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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Oct 18. 2024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당신을 속이고 있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환상이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방법



 요즘은 어딜 가나 <흑백요리사> 이야기뿐이다. 스타 셰프들이 재야의 고수들과 맞붙는 이 프로그램은 한국 대중의 유서 깊은 서바이벌 사랑에 다시 한번 불을 지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참가자들이 정해진 규칙 안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최종 우승자를 가려내는 방송이다. 특유의 자극적이고 드라마틱한 몰입감 덕분에 매년 히트작이 탄생하고 있는데, 넷플릭스의 <피지컬 100>, Mnet의 <스트릿 우먼 파이터>, tvN의 <더 지니어스>, 채널A의 <강철부대>, 유튜브의 <가짜 사나이>, 그리고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유재석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MBC의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까지, 이쯤 되면 대한민국에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비슷한 부류의 방송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다. 전반적인 경쟁 구조는 비슷하지만, 오디션은 심사위원과 대중의 평가를 통해 우수한 신인을 발굴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서바이벌과는 조금 다르다. 2009년 <슈퍼스타K>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오디션 열풍’에 휩싸였고 가수와 아이돌뿐만 아니라 작곡가, 코미디언, 아나운서, 프로게이머, 심지어 축구선수에 이르기까지 재야의 재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오디션이 열리고 있다.


왜 우리는 서바이벌을 사랑하는가?     

 

 이처럼 서바이벌/오디션 프로그램(이하 '서바이벌')은 한국 방송계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장르로 자리잡았다. 일시적인 유행으로 지나갈 거라는 예측과 달리, 2024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대중들은 ‘그 방송의 우승자가 누구인지’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대체 무엇이 대중을 이토록 열광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공정과 상식이 무너진 사회 속에서 대중이 열망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매개체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출발점부터 다른 ‘금수저’들과의 불공정한 경쟁 속에서 본인의 노력만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좌절하는 청년들에게 오로지 실력만으로 승리를 거머쥐는 서바이벌의 서사는 붕괴해 버린 희망의 불씨와도 같다. 역경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끝에 우승을 거머쥐며 ‘인생 역전’에 성공하는 오디션 참가자들 역시 끝없는 경쟁에 지친 시청자들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준다. 청년 실업자들에게 다시 일어날 용기를 준 것은 정치인들의 허울뿐인 공약이 아니라,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환풍기 수리공으로 일하며 남몰래 가수의 꿈을 키워온 <슈퍼스타K2>의 우승자 허각의 이야기였다.


서바이벌의 '공정한 경쟁'은 거대한 상징폭력이다     


 이처럼 서바이벌은 신자유주의가 소외시킨 계층을 따뜻하게 위로하며 그들의 절망을 치유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온다. 대중은 방송을 통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예속되며 더욱 절망적인 패배의식에 빠지게 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방송 속 경쟁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한정된 방송분량 속에서 참가자들의 비중을 할당하는 것은 전적으로 방송국 측의 결정에 의존하며, 그 기준은 오로지 PD의 주관에 달려 있다. 자연히 방송에 더 많이 노출된 참가자는 자신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기회를 갖는 반면, 적게 노출된 참가자는 이름을 알릴 기회를 잃게 된다.


 방송국은 방송분량뿐만 아니라 그들이 화면에서 어떻게 비춰지는지까지도 결정할 수 있다. 원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을 감동적인 서사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무고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도 있다. 이른바 ‘악마의 편집’을 통해 얼마든지 참가자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조작할 수 있는 것이다.


 출연자들이 소속된 연예 기획사나 프로그램 제작사의 지원, 그리고 그들만의 네트워크와 자본적 투자와 같은 ‘보이지 않는 손’이 물밑에서 작용하여 인위적으로 ‘주인공’이나 ‘영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오디션 프로그램인 <프로듀스 101>의 조작 스캔들은 방송이 만들어내는 성공 신화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슬픈 사례다.


 우리는 방송 참가자들이 공정하게 실력만으로 경쟁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본질적으로는 그 무엇보다도 불공정한 게임이다. 이러한 방송들을 시청함으로써 대중은 ‘공정한 경쟁을 통한 성공’이라는 허상이 실존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고, 신자유주의적 성공은 우승 트로피를 통해 상징적으로 신화화된다. 다시 말하면, 오디션과 서바이벌의 우승자가 정당한 실력으로 공정하게 선발되었으며, '탈락자들은 우승자보다 못해서 패배한 것'이라는 전제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성공이 철저히 개인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능력만능주의 신화를 대중의 무의식 속에서 재생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현상이 위험한 이유는 사회적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은폐하고 정당화시키는 신자유주의의 폭력성을 내재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중은 자신이 소비하는 콘텐츠가 불공정한 힘의 구조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그 안에 내재된 불평등을 받아들이게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이론을 빌리자면, 서바이벌/오디션 프로그램이 하나의 거대한 상징폭력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상징폭력은 문화적 자본을 통해 피지배자들에게 사회적 위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물리력에 의존하지 않고 복종하도록 이끄는 지배 기제이다. 몸에 가하는 폭력과 달리 상징폭력은 피지배자들에게 지배자들의 세계관, 의식과 욕망을 내면화하게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열등하거나 무가치하다는 인식을 하게 한다 (홍세화 4). 서바이벌의 경우는 경쟁만능주의와 능력지상주의 이데올로기를 시청자들에게 주입하여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경쟁의 결과가 개인의 역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공정 경쟁 신화'를 내면화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현실을 바꾸고 있다     

 

 서바이벌과 오디션 프로그램의 대중화는 신자유주의가 미디어를 통해 자가증식하며 대중을 감염시키는 매커니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상징폭력은 실질적인 정치사회적 흐름으로 이어져, 2020년대 한국 정계에서 신자유주의가 다시 득세하고 능력만능주의를 메인 담론으로 내세운 정치인들을 정계 내부로 편입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대표적으로 윤석열 대통령은 ‘공정과 상식’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정권을 탈환했다. 그의 메시지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속의 경쟁자들이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국민 각자가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기회를 획득하고 사회적 위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적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20대 남성을 중심으로 한 대안 우파 세력의 선봉장인 이준석 의원은 능력주의를 강조하며 젊은 층에게 '경쟁에서 승리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주입한 끝에 올해 4월 정치 인생 최초로 국회의원 당선에 성공했다. 윤석열과 이준석의 출현은 2020년대 사회의 극우화와 신자유주의 리바이벌 흐름의 연장선에 있으며, 그 이면에는 꾸준히 공정 경쟁 신화를 주입해 온 서바이벌과 오디션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론     

 

 대중에게 꿈과 희망을 제공하는 듯 보이는 서바이벌과 오디션 프로그램은 사실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상징폭력의 도구로 기능한다. 이들은 겉으로는 공정한 경쟁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구조적 병폐를 가리고 양극화와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사회적 불평등 문제는 개인의 실패로 전가되고, 능력주의라는 이름 아래 ‘기울어진 운동장’을 무시한 채 잔혹한 경쟁 지상주의가 공고화된다.



 결론적으로, 서바이벌/오디션 프로그램은 대중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성공 신화를 통해 사회적 무기력을 재생산하는 비극적인 장치로 작동한다. 죽을 때까지 바위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신화 속 시시포스처럼 대중은 끝없는 경쟁에 내몰리며 그 경쟁이 결코 공정하지 않다는 현실도 깨닫지 못한 채 좌절을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서바이벌과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은 단순한 오락적 현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견고한 자생적 매커니즘을 구축해 대중을 지배 구조 속에 철저하게 예속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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