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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Oct 22. 2024

칸트와 리오타르로 읽는 에스파 '아마겟돈'

현대 대중문화 속에서 숭고미의 발현은 가능한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 펼쳐진 장엄한 자연을 내려다보며 느끼는 감정과 케이팝 걸그룹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느끼는 감정이 같을 수 있을까? 얼핏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린다. 특히 경직된 미적 기준에 예속되어 평면적인 성적 판타지를 공장식으로 양산하는 케이팝 산업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가끔씩 드물게 케이팝에서도 숭고미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 배출되기도 하는데, 가장 가까운 사례는 지난 5월 발매된 에스파의 ‘Armageddon’ (이하 ‘아마겟돈’)이다.


 ‘아마겟돈’의 뮤직비디오는 코스믹 호러 장르의 문법을 차용해 임마누엘 칸트가 말한 수학적 숭고를 불러일으킨다. 코스믹 호러는 초월적이고 거대한 존재 앞에서 한없이 미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존재론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호러 장르다. 이 장르에서는 대부분 물리적 규모나 위력 면에서 인간이 대적하기는커녕 그 크기를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가 등장한다. 인간이 괴물과 싸워서 격퇴해내는 일반적인 크리쳐물과는 달리 코스믹 호러의 인간 묘사는 무력하기 그지없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강력한 미지의 존재 앞에서 인간은 그것이 품은 감정이 선의인지 악의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으며, 압도적인 무력감에 짓눌려 덧없이 스러져갈 뿐이다. ‘아마겟돈’의 뮤직비디오에서는 에스파 멤버가 미지의 괴생물체를 바라보며 서 있는데, 자욱한 안개 속에 가려져 괴물의 형체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거대한 크기와 기괴한 실루엣 때문에 섬뜩한 공포감이 느껴진다. 시청자는 이 괴물이 에스파에게 호의적인지 적대적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으며 그저 압도당할 뿐이다.


 칸트는 수학적 숭고가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거대한 대상 앞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는 무한한 존재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성의 힘을 통해 이를 초월하려는 순간에 경험된다. 에스파의 영상 속에서 펼쳐지는 코스믹 호러적 화면들은 바로 이러한 수학적 숭고를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칸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이성의 힘을 통해 이 무한성을 사유하려 한다. 비록 그 규모는 감각적으로 파악될 수 없지만 이성적 사유를 통해 그 거대함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영상 속의 에스파 멤버 역시 괴물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거는 등 이성적 접근법으로 미지의 공포를 인수분해하고자 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이는 수학적 숭고가 에스파의 ‘아마겟돈’에서 발현되는 방식으로, 무한한 우주적 존재 앞에서 자신의 미약함을 자각하면서도 이성적 접근을 통해 그 본질을 파악해내고자 하는 숭고한 경험을 드러낸다.                   


 두 번째로, ‘아마겟돈’ 뮤직비디오에서 나타나는 그로테스크적 비주얼은 칸트의 역학적 숭고를 느끼게 한다. 그로테스크의 미학은 인간의 형태나 구조가 왜곡되거나 일그러진 이미지를 통해 공포와 경외심을 자아내는 미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는 전통적 미의 기준을 깨뜨리고 불쾌감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마겟돈’은 다양한 장면들을 통해 그로테스크를 구현하고 있는데, 인간의 상반신에 번데기의 하반신과 나비의 날개를 이어붙여 곤충과 인간을 키메라처럼 접합한 형태를 드러내는 윈터의 기괴한 쇼트가 대표적이다. 


 다른 장면에서는 닝닝의 얼굴 표면을 뭉개고 파충류의 외피와 같은 질감의 컴퓨터 그래픽으로 덧씌우기도 하며, 카리나의 신체가 부정형의 리퀴드메탈과 일체화되어 연체동물의 촉수처럼 움직이면서 그로테스크성을 섬뜩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칸트의 역학적 숭고는 자연의 강력한 힘과 위력 앞에서 발생하며 그 힘을 이성의 의지로 극복하려는 순간에 체험된다. ‘아마겟돈’은 인간의 본래 형태가 미지의 힘에 의해 극단적으로 파괴되고 재구성되는 장면들을 통해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의 육체적 정체성이 붕괴되는 과정에서도 에스파 멤버들은 주체성을 잃지 않고 변화한 신체를 도리어 자신의 새로운 힘으로 전유해내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곤충의 날개를 달고 더듬이를 연상케 하는 왕관 모양의 헤드피스를 쓴 윈터의 모습에서 신체를 왜곡시키는 초현실적인 위력으로부터 인간의 이성이 끝끝내 통제권을 탈취해내며 역학적 숭고미를 완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마겟돈’은 섹슈얼리티의 철저한 제거를 통해 리오타르의 숭고 개념을 실현시킨다. 케이팝에서 여성 아이돌의 신체는 오랫동안 성적 소비의 대상으로 기능해왔다. 이는 아이돌의 성공과 대중적 인기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으며 대중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그러나 ‘아마겟돈’은 이러한 생산-소비 구조를 거부하고 오히려 에스파 멤버들의 신체를 젠더적 컨텍스트로부터 분리시켜 하나의 오브제로써 해체한다. 그동안 여성 아이돌을 성적으로 대상화시켰던 관습적 시선을 교란시키는 ‘아마겟돈’의 화면은 처음에는 본능적인 불쾌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이윽고 시청자가 에스파의 신체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효과를 촉진한다. 


 이 지점에서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숭고미 개념이 발견된다. 그는 숭고의 순간이 불쾌와 쾌가 교차하는 짧은 순간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아마겟돈’에서 멤버들의 왜곡된 신체를 보는 순간 시청자는 기존의 성적 매력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며, 익숙한 신체 이미지가 붕괴되는 불쾌감과 동시에 새로운 미적 체험을 하게 된다. 리오타르가 ‘그것이 일어나는가?’라고 표현한, 숭고의 긴장된 순간이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에스파가 섹스 어필을 벗어던지고 무정형의 존재로 변모하는 순간 관객은 해방감과 자유를 동시에 체험한다. 케이팝 산업의 성적 대상화와 규격화된 문법들이 무너지고 먼지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새 가능성이 태동하는 것이다. 


 리오타르가 말한 숭고는 바로 이러한 불쾌와 쾌가 교차하는 중간적 순간에서 발생한다. 섹슈얼리티가 제거된 그로테스크한 아이돌의 모습은 관습적인 아름다움의 규범을 파괴하고, 그 파괴 속에서 관객은 억압된 규범으로부터의 해방을 느끼게 된다. 이는 성적 소비라는 케이팝 산업의 구조적 모순을 폭로하며 대중이 그동안 아이돌을 어떻게 성적 대상으로 소비해 왔는지 반성하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모순적 감정이 공존하는 순간이야말로 리오타르가 꿈꾼 숭고의 진정한 체험이라 할 수 있겠다.


윌리엄 터너, <비 증기 그리고 속도>

 결론적으로, ‘아마겟돈’은 현대 대중문화 영역에서 숭고미가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에스파가 제시하는 코스믹 호러와 그로테스크의 미학, 그리고 안티-섹슈얼리티의 방법론은 기존의 미적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철학적 사유와 도덕적 반성을 촉발한다. 윌리엄 터너가 런던의 희뿌연 스모그 안개 속에서 숭고의 미학을 발견했듯, 고도로 상업화된 케이팝 산업 속에서도 숭고의 가능성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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