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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Dec 05. 2024

아일릿에게 일본 대중까지 '슈퍼 이끌린' 이유

12월 31일에 TV 앞에 온 가족이 모여 '가요대전'을 보며 새해를 맞이하던 그리운 기억이 있는가? 일본에도 비슷한 연말 시상식이 있는데, 바로 '홍백가합전'이다. 일본 음악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행사는 일본 대중문화계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홍백가합전에 초청된다는 것은 그 해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수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며, 가수들에게는 자신의 '성공'을 비로소 체감하는 순간으로 여겨진다.

  

▲ 하이브 레이블 빌리프랩 소속 신인 걸그룹 아일릿 ⓒ 빌리프랩


올해 홍백가합전에는 한국 가수 네 팀이 초청됐다. 트와이스, 르세라핌, 투모로우바이투게더, 그리고 아일릿이다. 이 중 특히 눈에 띄는 그룹은 아일릿이다.


일본 시장을 꽉 쥐고 있는 트와이스나 르세라핌, 일본 내 앨범을 7장이나 발표한 인기 보이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출전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올해 데뷔한 신인 그룹인 데다 일본에서는 아직 정식 데뷔조차 하지 않은 아일릿이 이 권위 있는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일각에서는 모기업 하이브의 힘이 작용한 게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홍백가합전은 자격 없는 팀을 기획사가 마음대로 '꽂아줄' 수 있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 인기의 실체가 없으면 출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일릿은 대체 어떻게 일본 대중을 매혹시켜 ‘모든 일본 가수의 꿈’인 홍백가합전에 입성할 수 있었을까?


▲ 아일릿 ⓒ 빌리프랩
일본 대중이 사랑하는 ‘카와이’ 계 걸그룹


일본어에서 ‘예쁘다‘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키레이(きれい)‘로 번역되지만, 실제로 ’키레이’는 성숙하고 우아한 매력이 있는 여성을 가리키는 뉘앙스에 가깝다. 젊은 일본 여성의 외모를 칭찬할 때는, 한국어로는 '귀엽다'는 뜻으로 번역되는 ‘카와이(かわいい)‘를 사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한국의 젊은 층은 ‘키레이’한 여성상을 선호하는 데 비해, 일본에서는 ‘카와이‘한 여성상이 선호된다고 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일반론적인 이야기다)


▲ 블랙핑크 ⓒ YG ENT.

이는 젊은 층에 의해 주로 소비되는 아이돌 산업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케이팝 아이돌의 경우 대다수가 ‘키레이‘ 계열로 분류된다. ’걸크러쉬‘의 대표주자인 블랙핑크를 비롯해, 에스파, 르세라핌, 아이브, 있지, 키스 오브 라이프 등 현재 활동하는 주요 걸그룹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 트와이스 일본인 멤버 유닛 '미사모' ⓒ JYP ENT.

반면 '카와이' 계열 걸그룹에 대한 수요는 오랜 시간 동안 사실상 트와이스의 독점 체제였다. 굳이 분류하자면 뉴진스가 이쪽에 속하긴 하지만, 뉴진스의 색깔은 영미권 틴에이저 감성에 가까워 일본 정서와는 살짝 빗겨나간 모양새다. 그런 트와이스도 어느덧 9주년을 맞이한 지금, 카와이계 시장에서는 트와이스의 뒤를 이을 확실한 후발주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하이브는 이 점을 재빠르게 캐치했다. 포화 상태에 이른 키레이계 대신 무주공산에 가까운 카와이계 쪽을 노리는 것이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규모의 음악 시장인 일본을 공략하기에 유리하다는 계산이 섰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대형 기획사에서는 아주 오랜만에 내놓은 정통 카와이계 걸그룹 아일릿이다.


일본 대중에게 친숙한 마법소녀 애니메이션 콘셉트

   

▲ 아일릿의 데뷔 프로모션 캘린더 영상은 세일러문을 연상시키는 그림체의 애니메이션 형태로 제작되었다. ⓒ 빌리프랩

전략은 매우 치밀했다. 모카이로하라는 두 명의 일본인 멤버가 포함되어 있어 초기 인지도 측면에서 매우 유리할 뿐만 아니라, 콘셉트 면에서도 일본적 테이스트를 듬뿍 버무려 일본 대중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중심 소재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정확히는 90년대 유행하던 <달의 요정 세일러문>, <사랑의 전사 웨딩피치> 등 고전 마법소녀물의 무드를 차용했다. 미국 애니메이션 파워퍼프걸과 협업한 뉴진스와는 대조적인 지점으로, 두 그룹의 타겟층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 아일릿 모카 ⓒ 빌리프랩

팬덤 내에서 화제를 모은 모카의 <Magnetic> 무대의상은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프릴 원피스와 헤드피스를 통해 금방이라도 애니메이션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캐릭터를 구현했다. 몽환적인 색채감이 돋보이는 데뷔곡 뮤직비디오에서는 아일릿 멤버들이 초능력을 사용하는 마법소녀들로 분하며 콘셉트의 지향점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틱톡을 이용한 바이럴 전략
▲ 아일릿 모카의 틱톡 챌린지 ⓒ 빌리프랩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된 콘텐츠를 홍보할 핵심 플랫폼은 틱톡으로 낙점되었다. 한국에서도 10대 중심으로 이용자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지만, 일본에서 틱톡의 영향력은 훨씬 지대하다. 케이팝의 주된 타겟인 일본 10~20대 사이에서는 틱톡 이용률이 50% 이상을 돌파했다. 틱톡의 월간활성이용자(MAU) 수가 저조한 성장률을 보이며 고전하고 있는 한국 시장과는 정반대다.


▲ 아일릿 이로하 ⓒ 빌리프랩

틱톡에서 '먹히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는 장르 선정이 중요하다. 숏폼에서 많이 사용되며 이용자층이 선호하는 몇몇 장르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아일릿은 과감하게도 케이팝에서 아직 시도되지 않은 플럭앤비(pluggnb) 장르를 택했다. 하이톤의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트랩 비트가 특징적인 플럭앤비는 특유의 키치한 질감으로 10대들의 감성을 저격해 최근 틱톡을 지배하고 있는 장르 중 하나다.


아일릿은 이 플럭앤비 사운드에 캐치한 훅과 강렬한 하우스 베이스를 덧입혀 케이팝의 규격에 알맞게 재가공했다. 이에 더해, "슈퍼 이끌림", "여잔 배짱이지" 등 짧은 시간에도 강한 임팩트를 남길 수 있는 펀치라인들을 곳곳에 배치해 숏폼에 최적화된 음악을 탄생시켰다.


이처럼 치밀한 전략이 더해진 끝에 아일릿의 데뷔곡 <Magnetic>은 그야말로 틱톡을 휩쓸었다. 100만 개가 넘는 숏폼 영상이 쏟아졌고, 누적 조회수 10억 뷰를 돌파했다. 급기야는 지난 15일 열린 틱톡 어워즈에서 '베스트 바이럴 송' 상을 수상하는 데 이르렀다. '베스트 바이럴 송'은 틱톡 내에서 글로벌 성적이 가장 좋았던 곡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올 한 해 일본을 포함한 전세계 틱톡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들은 케이팝 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일본 시장에서의 향후 행보 기대돼
▲ 아일릿 민주, 모카 ⓒ 빌리프랩

시장 분석, 콘셉트 구체화, 음악 제작까지 모든 단계에서 일관성과 완성도를 잃지 않은 우수한 기획력을 바탕으로, 아일릿은 기어코 일본 시장을 뚫어내는 데 성공했다. 6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권위 있는 시상식인 일본 레코드 대상의 신인상 수상자로 지명된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케이팝 걸그룹이 이 상을 수상한 것은 투애니원 이후 13년 만이다. 아직 정식 일본 데뷔도 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가히 이례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이제 아일릿은 오는 12월 31일 홍백가합전을 통해 일본 대중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예정이다. 이 무대는 그들이 일본 시장에서 거둔 성과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표가 될 것이다. 정식 일본 데뷔는 아직이지만, <Magnetic>으로 입증된 빌리프랩의 프로듀싱 역량은 아일릿의 추후 행보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이고 있다. 자석처럼 강렬한 매력으로 일본 대중을 다시 한 번 ‘슈퍼 이끌리게' 할 아일릿의 내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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