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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원 Apr 24. 2023

냄새 먹는 하마

  P는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후 미각을 잃었다. 정확히는 된장고추장아찌를 먹고 나서부터였다. 할머니가 사라진 집은 으스스했다. 촉감으로만 느껴지는 무언가가 집에 발을 내딛는 순간 확 끌어당겨 자신을 심연 속에 빠트릴 것 같았다. 그 실감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길을 떠났다. 정처 없이 숲속을 헤매고 다니면 할머니가 없어서 생긴 무서움증이 조금은 가셨다. 무뚝뚝해 보이면서도 한없이 다정한 나무들과 그들의 부모 같은 우람한 산이 P의 찢긴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덕분에 힘을 얻어 도시로 돌아왔다. 할머니가 영영 떠나버린 빈 집에서 웬일로 설핏 온기가 느껴졌다. 무심코 냉장고를 열었다. 뿌연 플라스틱 용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뚜껑을 열었다. 아…… 된장고추장아찌…… 가슴이 철렁했다. 할머니의 얼굴을 마주한 것 같아서였다. 당신이 밥상에 꼬박꼬박 올려놓던 된장고추장아찌. 이것만큼 개운한 반찬이 없다고,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 할머니는 된장고추장아찌를 넉넉히 담가 아껴 먹었다. 된장에 버무린 누런 고추. 짜고 군내가 나서 P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날 P는 손가락으로 된장고추장아찌를 집어 먹었다. 할머니와 조우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게. 그리고는 미각이 둔해졌다. 

  이상하게도 미각을 잃으면서 후각이 예민해졌다. 오늘 점심 때 P는 홈플러스에 갔다가 푸드코트에서 해장라면을 주문해 봤다. 결국 칼칼한 국물만 몇 번 떠먹고 말았다. 대신 식품 매장에 들러 방울토마토와 달걀, 냉동만두, 어묵, 자반고등어, 미나리를 샀다. 매장을 돌면서 허기를 달래듯 장바구니를 채웠다. 귀가해서는 달걀부터 삶았다. 작은 보름달 같은 노른자를 보는 순간 또 끈끈한 무언가가 혀에 감겼다. 음식물을 차단하는 신호였다. 입은 오로지 물만 허락했다. 먹지 못하면서도 움직일 수 있는 건 생생한 후각 때문이었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김치만두를 반으로 갈라 냄새를 맡으면 포만감이 느껴졌다. 청양고추를 넣고 매콤하게 볶은 어묵에 코를 대면 “아! 맛있어!”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자반고등어조림이 먹고 싶으면 바로 만들어서 냄새를 맡았다. 짭짤하고 비릿한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면 입안에 침이 고였다. 냄새를 빼앗긴 음식들은 윤기마저 잃어버려 나무에서 쓸려나온 붉으죽죽한 톱밥처럼 보이기도 했다. 

  냄새로 배를 채우는 식습관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가 많아졌다. 죄스러웠지만 살아남으려니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처지라서 먹지 않아도 장을 봐야 했다. 물 먹는 하마가 아니라 냄새 먹는 하마였다. 하마는 음식뿐만 아니라 옷장, 욕실, 주방, 신발장의 냄새까지 집요하게 빨아들이는 듯했다. 할머니가 등을 돌린 집에서 P는 냄새로 끼니를 때우며 하마로 변해갔다. 내일이면 할머니가 먼 길을 떠난 지 49일이 된다. 장례식이 그랬듯 이번에도 조촐하게 할머니를 만날 것이다. P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단둘이 이십 년 넘게 살았다. P에게는 할머니가 곧 부모였다. 버려질 뻔했던 인생이 할머니의 야무진 손길로 인간답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P는 다짐했다. 냄새를 먹고라도 꿋꿋이 살아야겠다고. 할머니가 그토록 좋아했던 된장고추장아찌에 맛을 들여 당신을 살아나게 하겠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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