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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한결 Sep 18. 2020

인성은 이름의 그림자 속에서 자란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이름은 소중하다

누가 이름을 함부로 짓는가?


조카로부터 안부 전화를 받았는데 뜬금없이 개명한단다. 이유를 들어보니 본인은 자신의 이름이 너무 쉽게 불려 싫고, 상처받은 적이 많다는 거다. 이름은 쉽고 친근해야 하고, 타인으로부터 많이 불려야 큰 인물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조카에게는 상처가 된다니. 조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다. 한편으로는 이름을 함부로 지어서 조카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염려가 된다.


사실 조카의 이름은 나와 큰형님이 합심해서 지은 이름이기도 하다. 생애 처음으로 큰형님이 아빠가 되고 나는 삼촌이 되는 경사를 맞이해서 오랜 시간 고민했던 건 바로 이름이다. 여러 가지 이름을 조합해봤는데, 내 이름과 큰형님 이름을 한 글자씩 조합해서 쓰면 어떨까 하는 의견에 큰형님이 좋다는 의견. 나와 큰형님의 아명(兒名)에서 한 글자씩 조합하니 그럴싸한 이름이 만들어졌고, 그때부터 조카의 이름이 된다.


내 형제들은 태어나면서 불린 아명(兒名)과 현재 사용 중인 본명(本名)이 다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내 이름이 다르게 호명되어 상당히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가족이나 친지들이 우리 형제들을 부를 때는 아명을 쓰고, 본명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 알게 된 모든 이들로부터 불린다. 형제들이 두 개의 이름을 품고 산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이름과 관련한 풍습이 남아 여전히 아명을 선호하는 분들이 내 주변에 많다.


익숙해서 그런지 이름이 정겹고 또한 나와 큰형님의 아명에서 하나씩 가져온 것이기에 더욱 애착이 가는데 조카는 아니란다. 친구들이 다정하게 불러줄 때는 좋은데, 성인이 되어 직장에 취직해보니 일을 시키기 위해 아무나 막 부른단다. 이름이 쉽다는 것이 이유라면서. 특히 직장 상사가 일의 경중을 떠나 지시할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조카의 이름이라니 그 심각성을 알 것 같다. 매번 다른 직장에서 같은 경험을 했다니 그 스트레스를 어찌 해소했을까 싶다. 본인이 불편하고 싫다는데 다른 이유가 있나.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바꾸고 새로운 마음으로 사는 게 좋을 테니 조카의 개명을 반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인성은 이름의 그림자 속에서 자란다.


쉽고 좋은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곤란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타인에게 불리는 흔한 대상 중에서 이름은 몇 손가락 안에 들 테다. 직장에서는 부성(父姓)에 따라 김 이사, 이 부장, 박 차장, 강 과장, 한 대리 등으로 쓰겠지만, 그 외에는 대체로 이름이 많이 쓰인다. 특히 부성을 제외한 두 글자의 이름이 빈도수가 많을 것이다. 이는 친밀도에 따라 현격히 다른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나와 타인이 친해지면 어느새 부성을 제외한 이름만이 오롯이 존재의 의미를 대변한다. 친구나 친지 모두 그렇지 않은가?


타인이 하도 많이 불러서, 피하고 싶은 순간에 자꾸 불리니 어느 순간부터 소심한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조카의 말이 가장 가슴 아프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부를 때 이름이 쉬우니까 가장 먼저 불려 무언가 해야 하고, 또 어느 경우든 자꾸 자신의 이름만 불리니 이름 자체가 싫어졌단다. 조카는 성인이 되면 부모님 동의 없이 개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군대 제대 후 직장생활을 몇 년 경험한 후 개명신청을 한다. 결국 지금은 이름을 바꿔 사용 중이다. 좋다고 생각한 이름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좋은 이름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사람의 성품이 바뀐다면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인성은 이름의 그림자 속에서 자란다는 내 평소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례가 된 것 같아 씁쓸하고 한편으로는 조카에게 많이 미안하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이름은 소중하다.


길을 가다 보면 길고양이나 야생화된 들개를 보는 경우가 가끔 있다. 새끼 때부터 사람의 손에 길든 경험이 있는 고양이나 개는 사람에게 곧잘 다가온다. 버려지긴 했으나 아직도 온정이 남아 사람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증거일 테다. 개와 고양이를 공포로 느끼는 아내와 달리, 나는 길거리에서 이 생명을 만나면 아내에게 허락 받고 만지곤 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아내는 멀리 떨어져서 이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다.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진 상태로. 만진 후에는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그래야 아내의 손을 잡을 테니.


동물들이 사랑스럽다고 사람의 이름을 갖다 쓰는 사람을 알게 되고는 사람의 다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예명 - 심지어 본명까지 - 을 개나 고양이에 붙여서 쓰는 사례가 있다는데 실제로 그런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외국에서는 이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사례도 있다지만, 아직은 내 정서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사람과 같다는 말과 실제로 사람이라는 존재 의미에는 분명 괴리감이 있을 테니.


이름은 숭고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보다 깊은 의미가 있다. 이름이 험하고 더러우면 장수한다는 옛날 분들의 그릇된 믿음이 있었는데 이는 옛말이다. 부모님이 당신에게 개똥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면, 타인은 당신을 은근히 개똥 취급할지도 모른다. 


생명의 탄생은 축복이며 경사스러운 일이다. 특히 아기가 태어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거룩한 일이다. 이토록 귀하고 소중한 아기에게 부모님이 가장 깊은 고민을 하고, 사랑을 듬뿍 담아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이름을 선물하는 일이다. 이름이 가진 숭고한 의미가 이러한데 어찌 개나 고양이에게 사람 이름을 붙인단 말인가? 사람과 동물이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사람의 이름을 써야 한다면, 나와 관계된 모든 이들의 이름이 사용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지킬 의무와 권리가 있으니까.



Written By The 한결.

2020.09.18 대한민국 대구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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