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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젤라또 Mar 20. 2022

응답하라 2000

에어 캐나다, 22년간의 비행의 마침표

2020년 3월 12일 오전 10시, NBA 사무국이 리그 중단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사실 며칠 전만 해도 무관중 경기에 대한 언급이 있긴 했지만, 이처럼 급작스럽게 리그 중단이라는 결정이 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NBA팬들 뿐만 아니라 마크 큐반 구단주, 르브론 제임스, 팀 던컨 등 NBA와 종사했던 전·현직 선수, 프런트까지 모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 하루였다. 이런 와중에 오늘 인스타그램 검색창을 보다가 트레이 영이 가볍게 핸즈 오프로 건넨 공을 빈스 카터가 3점으로 연결시키면 자연스럽게 경기가 마무리되는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영상이 길진 않았지만 복잡하고도 미묘 감정이 교차했고, 영상 속 그는 웃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 한구석이 찡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프랑스 대표팀 센터(프레드릭 웨이스, 218cm)를 넘었던 그의 비행은, 2020년 또 다른 프랑스 대표팀 센터에 의해 불시착하게 되었다. (고베어의 행동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에 대한 악감정은 없고 빠른 쾌유를 바랄 뿐이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막을 줄 몰랐지, Bleacher Report via Getty Images>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많은 것이 변했고 늘 좋을 것 같았던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다. 매년 잘 챙기던 친한 친구의 생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어제 또 다른 친구의 연락을 받고서야 부랴부랴 축하의 메시지를 건넸다. 세월의 흐름이 남 일 같지 않다는 걸 느끼지만 아직도 20년 전 2월 13일 그날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여전히 생생하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틀렸고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감으로 연일 신문은 새천년에 대한 뉴스를 쏟아냈다.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된다는 복잡한 심경 속에 그날도 여느 날처럼 친구 집에서 EA Sports의 NBA Live 2000을 했고, 밸런타인데이가 하루 앞이었지만 그것은 정말 1도 중요하지 않았다. 케이블 TV의 보급은 더 이상 홍콩 스타 TV에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와 중국어로 된 NBA 경기를 시청하지 않아도 되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해의 올스타전은 NBA라는 새로운 세포가 한국이라는 배지에 배양되기에 아주 적절한 환경을 갖추었다. 그리고 모두의 기대 속에 마치 옷에 적힌 랩터스라는 글자가 이상하리만큼 잘 어울리는 외모를 가진 선수가 그의 차례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고, 온 카메라는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드리블을 하며 왼쪽 베이스라인 쪽을 타면서 반시계 방향으로 떠올라 360도를 회전하며 윈드밀 덩크를 림에 꽂았다. 그 날의 퍼포먼스를 본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들이 느꼈던 전율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경험했을 것이다. (2018년 올스타전 전야행사에서 도노반 미첼의 퍼포먼스를 보고 새삼 그의 대단함을 더 느꼈다.)  새로운 덩크의 제왕이 탄생한 날이자 적어도 21세기에 한해서는 덩크슛라는 농구의 한 분야의 대명사가 만들어진 날이기도 했다. 특히 마이클 조던의 은퇴 이후 파업 등으로 어수선했던 세기 말을 지나 새로운 스타를 찾던 NBA에 포스트 조던 시대 서막을 알리는 모멘텀이 된 사건은 분명해 보였다.


<마! 이게 덩크다>


 이후 그의 행보는 어쩌면 우리가 기대했던 포스트 조던의 행보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 보였다. 2000~2001년 시즌 토론토 랩터스를 콘퍼런스 파이널로 진출시켰지만 끝내 앨런 아이버슨이 이끄는 필라델피아와의 치열한 승부에서 3승 4패로 무릎을 꿇었고, 승부가 치열했던 만큼 아쉬움이 컸던 팬들은 그가 콘퍼런스 파이널 중 있었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학사 학위식에 꼭 참여해야만 했었나?'라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2004~2009년까지 뉴저지 네츠에서 뛰면서 제이슨 키드, 리처드 제퍼슨과 같이 팀을 3 연속 플레이오프까지는 진출시켰지만 콘퍼런스 세미 파이널의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그 뒤로는 드와이트 하워드가 이끄는 올랜도에서 콘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보스턴에게 패하면서 더 이상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노스 캐롤라이나 출신 6피트 6의 슈팅가드, 폭발적인 운동 신경의 소유자...

 어쩌면 참 조던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던 그는 덩크슛을 제외하곤 조던의 후계자들(NBA 파이널 5회 우승의 故 코비 브라이언트, 동티맥 서코비 시대의 한 축이었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The Answer 앨런 아이버슨)에 비해 임팩트가 가장 약했다. '승부욕이 부족하다', '타고난 운동 신경을 100% 이용하지 못한다'는 평이 커리어 내내 따라다녔다. 그렇게 그는 어느덧 리그에서 잊혀진 선수가 되었고, 전형적인 저니맨으로 커리어를 마감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19년 8월 애틀랜타 호크스와 1년간 재계약하면서 그의 22번째 시즌이자, NBA 역사상 네 번째 다른 10년대를 뛴 최초의 선수가 되었을 때, 더 이상 카터는 포스트 조던 시대의 안타까운 미운 오리가 아닌 마지막 올드 스쿨의 멤버로 재평가되고 있었다. 혹자는 그의 무릎이 버틸 수 없어 결국 부상으로 커리어를 접을 것이라고 예상한 이도 있었고, 결국 덩크슛만 기억에 남는 선수로 남을 것이라는 전문가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세간의 평가를 비웃기라도 평균 이상의 3점 슛 능력(3점 슛 성공 NBA 통산 6위)을 인정받으며, 자신만의 강점을 가진 선수로 롱런했다. 또한 비록 우승 반지를 가지진 못했지만 우승을 위한 링 체이서로 커리어를 마감하기보다는 자신이 필요한 팀이면 몇 분이 되든 출장시간을 보장받기 위해 기꺼이 팀을 옮겼다. 특히 요즘같이 우승을 위한 슈퍼팀을 만드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에 반지에 연연하지 않는 그의 선택은 많은 이들이게 신선함(?)으로 느껴질 정도다. 시간은 흘렀고 과거의 부정적인 시선은 다시 한번 변했다. 불혹이 지난 선수가 코트에 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후배들에게는 큰 귀감이 되었고, 그는 아트 덩커가 아닌 농구를 진정 사랑했던 사나이로 2000년의 그 날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받고 있다.


 백넘버 15번, 나의 마지막 덩크 히어로
정들었던 코트와 작별을 고할 그를 생각하며 그 날의 전율을 떠올려 본다.
응답하라 2000

<반지보다는 농구를 사랑했던 사나이, NBAE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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