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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젤라또 Aug 13. 2022

얼떨결에 초대받은 손님

[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_어느 수집가의 초대]를 다녀와서


 돌이켜보면 유치하지만 초등학생 시절 우리 반 반장의 생일 초대장은 '인싸'라는 말이 없던 시절, 유일하게 내가 그에게 단순히 동갑이 아니라 친구라는 것을 인정해 주던 보증수표였다. 그 시절 왜 그리도 부끄럼이 많았는지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혹여나 무리에서 이탈할까 노심초사했고, 누군가에게 초대받지 못했다는 것은 늘 마음 한구석에 씁쓸했던 기억으로 각인되었다.


40이 다 돼가는 지금도 초대받지 못한 그때의 내가 될까 싶어, 한증막 같은 날씨 속에서도 100분의 시간을 기다려 내가 '인싸'임을 겨우 증명하고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이하(이건희 展)은 [어느 수집가의 초대]라는 부제로 그동안 故 이건희 회장이 수집했던 350여 점의 작품을 공개했다. 갑자기 떠오른 에피소드라면 내가 보기엔 거의 처음 보는 작품이라 모두가 호기심의 대상이었지만 유독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작품이 있는 방면, 일행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품도 있었다. 처음에는 작품마다의 선호도가 달라서 그랬겠거니 했지만 전시회를 마지막이 되어서야 빨리 지나치는 작품 설명 말미에 거의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말이 있다는 걸 알았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적당한 생략은 삶의 지혜이자 적당한 여백의 수묵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련



수련 [클로드 모네]_故 이건희 회장 기증 기념展


 이번 전시의 쌍두마차였던 [인왕제색도]는 이미 조기 퇴근을 했기에 홀로 빈방 지키던 '수련'에 많은 이들의 눈길이 쏠렸다. 지베르니 정원 속의 수련을 본 사람이라면 모네의 위대함을 자연스럽게 느꼈을 테지만, 교과서로 모네를 배운 나는 인상파(印象派)라는 3글자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던 모네가 대상을 변화를 보려 했던 창작의 고통을 너무 함축적으로 외운 것 같아 죄책감마저 들었다. 모네의 '수련'이야 워낙에 유명하기도 하고, 이왕에 죄책감을 가진 거 오늘도 작품평은 이걸로 줄이기로 하겠다. 





산정도



산정도 [박노수]_故 이건희 회장 기증 기념展


  우리나라에서는 박노수라는 이름보다 배우 이민정의 외할아버지로 더 유명한 박 화백의 '산정도'는 이번 전시의 신 스틸러였다. 어차피 미술이야 내가 보는 관점에서 좋았던 그림을 고르는 것이니 호불호를 드러내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혹시나 작가의 작품을 모르고 글을 적는다는 게 부담스러워 다른 블로그를 통해 그의 작품을 참고했음을 먼저 양해 부탁드린다. 


 '산정도'를 첨 봤을 때는 한 여인이 말의 모가지를 비틀 듯 붙잡고 바위산을 오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보통 사군자를 봤을 때 선비의 기개나 독야청청의 자세가 엿보이는 것처럼 비록 그 대상이 사군자는 아니지만 '산정도'에서도 야인(野人)과 말(馬)의 역동적인 움직임, 바위산의 험준한 산세 그것을 종이에 꽉 차게 표현한 작가의 그림에서 에너지가 느껴졌다. 모르긴 몰라도 수집가의 입장에서 이런 '산정도'가 가진 에너지가 이 작품을 선택하게 하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해 봤다.


 원래 남정 박노수 화백은 수묵담채화로 한국의 산수를 잘 표현한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사실 '산정도'와 같이 여백 없이 종이를 꽉 채운 그림보다는 수묵화의 정석처럼 적정한 여백과 선을 채운 먹의 움직임 그리고 보다 다채로운 색상을 특유의 농담(濃淡)으로 구현한 작품이 많다. 나는 오히려 그의 다른 작품을 보고 나니 더욱 '산정도'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최근에 다녀왔던 설악산의 울산바위나 인왕산과 같은 악산(岳山)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그림과 절묘하게 오버랩 되면서 공명을 일으킨 것이 같았다. 다른 이야기지만 그림에서 여인이 말을 몰고 가려 했던 곳이 산이 아니라 우측 상단 귀퉁이의 초승달은 아니었을까라는 글을 읽고 나서야 달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아직도 좁디좁은 시야로 무언가를 쉽게 평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백로[박노수], ▷수렵도[박노수]_출처:https://blog.naver.com/ohyh45/20199748583?viewType=pc


 한편 '산정도'는 그림의 구성은 특이하지만 그가 좋아했던 비마(飛馬)를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림 속에서는 느낄 수 있지만 험준한 악산(岳山) 오르는 말은 지독히 정확하게 스텝을 밟지 않는다면 불가능에 가깝다. 즉 말은 뛰는 것이 아니라 비행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맥락으로 유니콘의 존재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말은 날개 없이도 날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험준한 바위산을 그려 넣음으로써 말이 날고 있음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비마(飛馬)의 모습은 그의 다른 작품인 '수렵도'에서도 잘 볼 수 있는데, 비록 화풍이나 구성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풍경 속에 말과 인간이라는 존재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작가의 생각은 같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판잣집 화실



판잣집 화실[이중섭]_故 이건희 회장 기증 기념展
이중섭 문화거리(부산 범일동)_네이버 지도


 이중섭의 '판잣집 화실'을 보면서 화가 이중섭의 작품세계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그림을 보고 여기가 바로 여기가 떠올랐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신기했다. 어쩌면 정말 대충 그린 듯한 그림 속에 디테일이 녹아 있고, 그의 예술가적 자유로움 속에 따뜻한 감성이 남아 있다. 그렇기에 '판잣집 화실'의 다른 작은 부분까지도 함부로 지나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색채다. 무채색으로 쉽게 칠해 놓은 듯한 집 밖의 풍경과 달리 집안은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다. 장기하의 노래 '싸구려 커피'에 등장하는 같은 비닐 장판이 왠지 모르게 노란색인 거 같은 것처럼 '판잣집 화실'의 노란색 집안 풍경도 노란 장판의 분위기를 묘사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 노란 장판이 당시에도 있어서 노란 공간이 탄생했는지 아니면 전구가 비치는 주변 환경을 노란색을 묘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의 소품과 화자의 모습에서 뭔가 모르게 찌든 듯한 냄새가 날 것 같은 단칸방의 풍경이 마치 느껴지는 듯했다. 


  장난스러운 분위기의 만화적 상상력을 더한 화풍 속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누워있는 화자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하기도 인간적 동질감을 느끼게도 한다. 실제 그의 모습은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가족과 떨어져 혼자 있는 나를 삶의 힘듦과 별개로 사실적이지만 유쾌하게 표현하려 노력한 것 같다. 후대에 우리가 이 그림을 볼 때 그의 힘들었던 형편이나 가족과의 이별 등 안타까웠던 그와 감정이입하게 되니 마냥 기쁘게만 볼 수 없는 것이지 그림 자체는 해학적이다. 

꿈을 찍는 사진사[박완서]_네이버 도서

  작품 외적으로 박완서 작가의  '꿈을 찍는 사진사'라는 책이 있는데, 박 작가의 초기 작가의식을 표현한 4가지 에피소드 구성된 70년대 한국의 소시민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을 읽어보진 않아서 정확히 이 스토리들과 '판잣집 화실'이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림 속 따뜻한 분위기와 별개로 누워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림 속의 주인공이 처한 현실의 동질성이 이중섭의 그림과 궤를 같이 하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해 본다.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Flag=1&exhId=202207190001542

 이번 이건희 展을 계기로 이중섭의 작품 역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것 같다. 2022년 8월 12일부터 2023년 4월 2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을 진행하고 있으니 이중섭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그의 다른 작품과 더 많이 만나실 수 있다고 한다.(위쪽 링크 참조) 







손[권진규]_故 이건희 회장 기증 기념展


 '손'은 하늘을 향한 손끝의 모양이 태권도의 '편 손끝 지르기'의 모양을 하고 있는 듯, 힘 있고 곧게 뻗은 형태에 먼저 작품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흔히 손금에서 말하는 지능선을 중심으로 엄지와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더 큰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아마 실제 본인의 손을 펼쳐본 사람이라면 이 손이 실제 인간의 손과는 다른 비율을 가졌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아마 이런 비율의보다는 '손'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예술적 본질을 담기 위해 부단히 생각하고 연구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와이프가 이건희 展의 프리뷰를 통해 꼭 보고 싶었던 작품으로 손꼽았던 작품이다. 팔의 하박까지만 조소된 작품만으로도 사람의 궁금증을 일으키게 했던 '손'의 매력은 실제 현장에서도 충분히 느껴졌을 만큼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아마 컬렉터 역시 이런 작품의 매력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제자의 얼굴상을 만드는 권진규_출처: 삼성문화재단, ▷지원의 얼굴[권진규]_호암미술관

 

 권진규는 한국 근대 미술을 대표 조각가로 1922년 함경남도의 부유한 집안에서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을 거쳐 한국에서 생을 마감한 작가이다. 작가의 생에를 간략히 적었기에 그의 모든 것이 너무나 쉽게 여겨지지만 그의 인생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 그는 조각은 작품으로서 인정을 받는 등 촉망받던 조각가였지만, 귀국해서는 조소 대한 몰이해 및  한국 미술계와 갈등을 겪으며 그의 작품은 국내에선 그리 인정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는 돌연 한 장의 유서를 남긴 채 51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손'이라 작품 역시 권진규를 지켜보았던 김문호 명동 화랑의 대표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이 그의 제자인 김의 손에 들어가고 권진규 추모 1주기 기념전 주목받게 되자 '손'의 원소유자인 김문호 대표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다시 넘겨주게 되고, 원로 컬렉터인 김용원 씨에게 갔다가, 1988년에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권진규 15주기 기념전을 계기로 이 전 회장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물론 각 작품마다 그만이 가진 인연이 있지만 '손'이란 작품 역시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하다 권진규의 사후에 여러 사람의 손을 타면서 현재의 주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말[권진규]_출처: RM 인스타그램


 권진규는 '손'이외에도 '지원의 얼굴'이 유명한데 아마 국정교과서를 공부했던 이들이라면 한 번쯤을 본 적이 있는 작품일 것이다. 또한 비교적 최근에 열렸던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의 전시에 방탄소년단의 RM이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권진규의 '말'이 전시되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던 적이 있다.







 이건희 展을 모두 둘러보고 난 후,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이런 많은 컬렉션을 가지고 눈을 감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라는 후기에 나 역시도 많은 공감했다. 미술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이렇게 많은 작품을 하나의 전시를 통해 이 가격에 만나본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삼성家의 상속세와 이번 전시와의 연관성을 묻는 사람들도 많지만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좀 더 다양한 전시가 서울뿐 아닌 다른 지방에서도 열린다면  미술의 대중화에 대한 기여로 많은 논란을 불식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고생한 만큼 좋은 전시였고, 다음에 또 다른 전시를 통해 블로그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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