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 사야 하고.... 아, 과일도 약간 사야지."
갤러리라파엣 식료품 코너에 들러 출장 기간 동안 먹을 음식들과 평소 즐겨 마시는 마리아주 tea 몇 캔 그리고 선물용 쵸콜릿을 샀다.
간단히 사야지 했는데, 식료품 코너를 빠져나오는 나의 양손에는 혼자 들기 버거울 정도로 비닐봉지가 잔뜩 들려있었다.
'미련하지.... 내일 또 오면 될 것을...아휴.그나 저나 호텔까지 팔 꽤나 아프겠어.'
두 손에 봉지를 가득 들고 신호등 앞에 서있는데 누군가 내 옆에 바짝 다가선다.
"실례할게요. 무거워 보이는데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
고개를 들어 보니 파란 눈의 금발머리 남자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
영어 억양이 어색한 걸로 보아 프랑스 남자일까?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이 사람 무슨 수작이지?'
종종걸음으로 대답 없이 건널목을 건넜다.
"괜찮으시면 커피 한잔 함께 마시고 싶은데요..."
5년이나 여러 나라로 출장을 다녀왔건만 이런식으로 수작을 거는 남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음..... 보시다시피... 지금 제가 짐이 많아서요...."
"잠깐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래요. 잠깐이면 돼요."
겁이 나기도 했지만 금발머리 외모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호기심 반 두려움 반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뭐.. 카페에서 별일이라도 있겠어...'
파란 눈의 금발머리 남자는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파리에서는 은행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커프스링까지 한걸 보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의심하면서도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도 참...'
무엇 때문에 파리에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화는 1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이만 가봐야겠어요."
"아... 아쉽네요. 호텔이 어디예요? 제가 들어다 줄게요."
평소라면 거절을 했을 법도 한데 팔이 아플거란 핑계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럼... 그래 줄래요?"
스위스 남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호텔까지 걸어갔다.
생각보다 호텔은 멀지 않았다.
"다왔네요. 여기가 제가 있는 호텔이에요."
"아.. 벌써 도착했네요. "
아쉬움이 짙게 묻어 나오는 말투에서 무언가를 말할까 잠깐 머뭇거리더니.
그는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음.. 저.... 내일같이 저녁 먹을래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아주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이내 그의 휴대폰에 나의 연락처를 적어 주었다.
"문자해요 내일."
그리고 생각했다.
'왜인지 다시 만나고 싶어...'
'세인트폴 2번 출구 저녁 7시'
레스토랑이 아닌 메트로역에서 만나자고하는게 의아했지만 장소가 어디건 간에 나는 하루 종일 저녁시간이 기다려졌다.
오늘도 스위스 남자는 커프스링에 빡빡하게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다.
파리 시내에서 보기 드문 정장 차림 인지라 지나가던 사람들도 흘끗흘끗 그를 쳐다보는 느낌이다.
세인트폴 역에서 구불구불 골목을 한참을 지나서야 작고 아담한 비스트로가 보였다.
'이렇게 골목길이 많아서 메트로 역에서 보자고 했구나.'
정갈하게 세팅된 테이블로 무겁지 않은 세미 프렌치 코스가 서빙되어 졌다.
5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현지인들만 가는 레스토랑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이어서 좋은 건지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금발머리 남자 때문인 건지 설렘과 즐거움의 공기가 테이블 위로 넘실거렸다.
마지막으로 서빙된 달콤한 크렘브륄레를 한 입 넣고 있는데 ....
"첫눈에 반했어요. 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에 가장 빛나는 별처럼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 눈엔 당신만 들어왔어요."
'.........'
나는 스위스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스위스 남자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면서도 어린아이의 천진함이 느껴졌다.
'피부가 너무 뽀해서 그런가. 왜 진심으로 느껴져...'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크렘브륄레만 연신 입에 집어넣었다.
스위스 남자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어색한 저녁 식사를 마무리하고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썸을 타던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 며칠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