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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Loro Sep 17. 2021

하이브리드 심플라이프

맥시멀리즘과 미니멀리즘의 경계


“실장님. 부엌 창문 위는 상부 장을 하지 않고 시원하게 비워 둘 거예요.”

“사모님 그러면 수납이 부족 하실 것 같은데요? 팬트리도 따로 만들지 않으셨쟎아요.”


새로 들어갈 집의 부엌인테리어를 상의하며 싱크대 업체 실장님은 무척이나 염려스러워 했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시는 건지 상 부장을 하지 않는 만큼 이윤이 덜 남아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번이고 전화를 하셔서는 정말로 괜챦겠냐며 재차 확인을 하셨다.


'실장님 저는요 심플라이프를 지향하는 사람이예요. 수납장을 많이 만들게 되면 공간이 생겼으니 이것저것 물건들을 수납을 하게 될 거예요. 안하면 될 거 아니냐고 말씀 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또 그렇게 철저하고 완벽한 사람은 못되어서 말이죠. 수납장이란것이 마치 블랙홀과 같아서 한번 넣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물건을 쑤셔넣게 되거든요. 그러니 상 부장은 절대절대 설치 하지 않을 테니 설치하실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라는 말은 내 머릿속에서만 맴돌뿐 한마디도 내 뱉지 못했다.

그 후에도 디자인은 다시 바꿀 수 없다는 실장님의 다짐인지 선언인지를 몇 번이고 들어야만 했다.


내가 이렇게 수납공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된것은 중국에 살면서 나란 사람이란 비어있는 공간은 어떻게든 채우고 싶어하는 욕망 덩어리 라는 것을 다시 한번(이전에도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 깨닫고 나서이다. 남편이 중국 주재원 발령을 받게 되어 3년을 중국 서안에서 살게 되었다. 중국의 고급 아파트들은 웬만하면 70평을 웃도는 사이즈 여서 우리 가족도 80평에 가까운 복층형 아파트 에서 살게 되었는데 수납공간이 어찌나 많던지 이것저것 보기 싫은 물건들을 안보이게 숨겨놓을 수 있었다. 집에 놀러 오시는 손님들 마다 "어머 어쩜 이렇게 집에 물건이 없어요? " , "집이 너무 깔끔해요." 라고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많은 수납공간속에 착실하게 들어가 있는 어마어마한 물건들을 짐작이나 했을까? 3년간 나의 물건들은 처음보다 다섯배쯤 불어나게 되었다. 수납공간이 많으니 사고 또 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나조차도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인지 그 맣은 물건들을 쌓아놓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건 욕심이 없는 심플라이프를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3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가기위해 물건들을 정리하려다 꼼꼼하고 치밀한 나의 수납력에 놀라 뒤로 자빠질뻔 했다. 정리의 장인으로 나가도 손색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구석구석 물건을 어찌나 잘도 숨겨 놓았던지 이 많은걸 내가 언제 산 것이며 왜 산 것인가? 기억도 나지 않는 물건들이 튀어나올땐 기가 막히다 못해 코까지 막힐 지경. 국제 이사 업체도 혀를 내두르며 짐이 계속해서 나와서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겠다며 걱정스러워 했다. 당초 오후 1시면 끝낼수 있을것 같다고 했던 이삿짐 포장은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 이삿짐을 싸는날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수납공간 자체를 많이 만들지 않으리라. 보이는 물건만으로 만족스러운 그런 삶을 살겠노라고, 다시는 이런식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무광의 화이트 싱크대와 상부장이 없어 환하고 탁트인 미니멀한 부엌이 완성 되었다. 로망하던 심플한 부엌을 갖게 된 즐거움과 환희의 기쁨도 잠시 중국에서 짐이 도착한 이 후 부터는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디서 부터 정리를 하고 비워야 한단 말인가. 구구절절 사연 없는 그릇 없고 필요 없는 냄비가 없으니 작아진 주방에 들어가야 할 많은 살림살이들은 내 자리를 찾아 달라며 아우성 이었다. 일단, 집 정리는 뒤로하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심플라이프 관련 도서들을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살림 정리법, 쌓아놓지 않는 습관, 버리는 습관 등 물건을 효율적으로 줄이는 방법에 관한 도서들을 읽으며 심플 라이프에 대한 이론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설레이지 않으면 버려라, 심지어 설레여도 버려라 라는 이야기와 미니멀리스트라면 응당 보여주곤 하는 거짓말 처럼 물건 하나 없이 깨끗한 테이블이 왠지 모르게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미니멀리스트가 정해놓은 심플한 삶의 경계는 어디까지 이고 나는 지금 그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느 선까지 고집을 부려야 미니멀리스트라 말할 수 있는 것이며 그 경계선을 넘어선 세상으로는 한발짝도 나갈 수 없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아무래도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인지 정신이 혼미해 진것 같다.


서양 요리를 즐겨 해먹는 나는 가지고 있는 조미료도 여러가지 이며 그것들을 줄이고 서는 내가 원하는 요리를 해먹을 수 없다. 식초의 종류만 해도 화이트 비니거, 발사믹 비니거, 애플 사이다 이렇게 세가지나 되는데 이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내가 좋아하는 무슨무슨 샐러드는 해먹을 수 없기에 줄인다 한들 다시 사게 될것이 뻔하다. 그리고 미니멀리스트에게는 여기저기에 잘 어울리는 백 1개면 족하다 하지만 출장다니며 사모은 여러개의 샤넬백을 미니멀리스트가 되기위해 1개로 정리할 마음은 결코 없으니 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이중인격자에 사기꾼이 된것 같았다. 많은 물건에 파묻혀 사는 것이 싫었고 내가 살아야할 공간을 물건 에게 내주고 있는 기분이 싫었지만 수도승처럼 건조하고 팍팍하게 사는 삶도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는 맥시멀리시트 인걸까?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아이러니한 조합인가.


서로다른 성질을 가진 요소를 둘 이상 뒤섞은 것을 하이브리드 라 한다. 요즘에는 전기와 휘발유 따위의 동력원을 두 종류이상 번갈아 가며 사용할 수 있는 자동차 라든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융합한 전자기기 등 하이브리드가 대세다. 계획한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나역시 그 대세에 합류해 본다. 삶의 풍요로움을 즐기는 맥시멀리스트 와 최소한의 소유를 지향하는 미니멀리스트의 어딘가를 왔다 갔다 하는 하이브리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선언한 것이다. 인생이란 언제든 슬며시 선을 넘어 밖으로도 나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끝단을 선택하기 보다는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까다롭게 굴어 보기로 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융통성과 까탈스러움이 혼재하는 하이브리드 심플라이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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