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입국에 필요한 코로나 검사도 점차 완화가 되고 4월 말쯤 7월 한국행 덜컥 비행기 표를 샀다.
7월 20일에 출국 그리고 8월 10일 귀국 일정으로.
온 가족이 다 같이 가지 못하고 달랑 표 두 좌석만 구입을 했다.
나와 첫째 아들만 가기로 한 것은 남편과 쉽게 합의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일종의 통보만으로 전하고 표를 냅다 끊었다. 일방적인 나의 결정이었다.
바캉스라면 온 가족이 다 같이 가야 가족 휴가인데, 차라리 다 같이 10월에 갔다 오자, 첫째를 2주 동안 못 보는 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 등 갖은 회유와 설득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나는 혼자, 아니 양심상 첫째는 데리고 가는 것이 내 최후통첩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둘째의 잦은 열성 경련. 둘째는 나의 온전한 휴식기를 갖기 위해서다.
둘째의 열성 경련은 그간 여러 번 걸쳐서 지켜보았더래도 아픈 아이 침대 맡에서 세상의 모든 신께 우리 아이 좀 살려달라 매달리는 그 순간만큼은 아직 내가 너무 힘든 까닭이다. 어른도 힘든 13시간 장시간 비행 그리고 한국의 뙤약볕 여름 속에 또 아이가 낯선 환경 속에서 경련을 하게 되면 내가 마치 정신을 잃지 싶었다. 만 3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는데 고향을 방문한다는 즐거움, 설렘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먼저 걱정하며 하루하루 불안할 내가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 처한 반복된 일상에서 그저 홀가분하게 벗어나고 싶었다.
둘째를 낳고 10개월 만에 복직을 해서 그때에 둘째가 처음으로 열성 경련을 해서 큰 병원이며 신경외과 전문의며 병원 문턱을 수없이 다녔고 그 와중에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가 갑자기 문을 닫더니 적당한 퇴직금만 손에 남고 나는 다시 재취업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하루하루 맘 졸이며 이곳저곳 인터뷰를 보러 다녔고 어떻게 하늘이 도왔는지 재취업에는 성공을 했다. 그런데 보모에게서 둘째가 코로나를 옮아와 온 가족이 코로나에 옴팡 걸려 2주를 좁은 아파트에서 격리를 해야 했다. 새 집 이사를 앞두고 이삿돈이 조금 모자라 포장이사를 못 맡기고 아픈 와중에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싸던 그게 작년 이맘때 즈음이었다.
내겐 지난 3년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추스를 새도 없이 다른 일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너무 지친 상태였다.
남편은 이런 나를 마치 혼자만 룰루랄라 편하게 휴가를 떠난다며 볼멘소리를 해댔다. 2주 휴가를 앞두고 회사에서 엄청난 양의 업무량에 심신이 지쳐갈 때 즈음, 한국 출국날을 앞두고 지나가는 남편의 날 선 말에 나는 결국 폭발을 했다.
등교 준비를 하는 아이들 앞에서 이성을 잃었던지 남편의 가슴팍을 퍽퍽 때려가며 '넌 왜 이게 이해가 안 되냐!' 몇 번이고 울며 소리를 질렀다.
두 아이들은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지 황당한 얼굴이다.
웬만해서는 아이들 앞에서 언성도 잘 높이지 않지만 휘몰이 장단 몰아치듯 울면서 몰아 대는 엄마의 모습은 아마 처음일 거다.
저 인간은 왜 이해를 못 할까.
만 3년 만에 내 부모님 얼굴 보러 가겠다는 마누라가 그렇게도 못마땅할까.
내가 온전히 2주 휴가마저 남편의 한국어 번역기로 일해주길 바랠까.
지가 원하는 그 가족 휴가가 뭐라고. 이번 한 번만 제발 봐달라는 걸.
매정한 사람.
이해를 못 하면 아쉽지만 이번 만은 어쩔 수가 없다.
난 너무 지쳤으니까. 더 이상 이해시킬 힘도 설득할 말도 내겐 없다.
때아닌 나의 통곡을 보고서 남편은 더 이상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여러 번 이해를 구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 번의 지랄 발광이 먹힐 때가 있구나,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출국날.
PCR 검사를 이틀 전에 했지만 결과가 나온 시간이 출국 시간 48시간을 조금 못 미쳐 출국날 마음 편하게 항원검사를 한번 더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일요일 쇼핑몰을 찾았다.
일요일 아침이라 쇼핑몰을 한산했다.
남편이 info 센터에 항원검사하는 곳을 물어보러 잠시 자리를 비운 뒤 쇼핑몰 안에 마련된 놀이터에서 내가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둘째가 놀이터 턱 위에 올라서서 점프를 한 두어 번 하더니만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 질 않아 놀란 마음에 달려가 보니 눈을 뒤집고 경련을 시작했다.
침착하자. 나는 이런 상황을 이미 겪었으니까.
발발 떨리는 손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하고 주변에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조용하던 쇼핑몰에 갑자기 소방대원이 몰려오고 삽시간으로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쌓다. 항원검사는 뒤로하고 구급대원에게 상황을 잘 설명하고 응급실로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우린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해열제를 먹이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둘째는 점심은 거의 먹지도 않고 잠만 내리 자더니만 오후 3시경 또 경련을 시작했다.
경련은 한 3분가량.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목이 마른지 한참을 마른침을 넘기고 나서야 30분 만에 아이가 정신을 차렸다.
하루에 두 번이면 벌써 많이 한 건데. 상태가 아무래도 심상찮다.
한 시간 후면 공항으로 가야 되는데 온갖 생각이 한데 섞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이대로 아픈 둘째를 두고 가는 것은 엄마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비행기 표를 취소한다는 말이 목턱까지 차올라도 그 말은 차마 남편에게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갔다와.
두 사람이 앉아서 걱정하는 거보다 한 사람만 걱정하는 게 낫지.
어차피 열성 경련은 약도 없으니 시간이 흘르고 그저 지켜보는 게 다야.
니가 있는데도 지켜보는 게 다라면 가는 게 낫지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고 남편은 그렇게 말을 해주었다.
눈빛은 내가 같이 있어주겠다고 내가 내입으로 말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는데 내가 다시 재차 묻자 다짐한 듯 다녀오라고 했다.
급하게 택시를 부르고, 공항을 가는 길은 온통 눈물뿐이다.
아침에 쓰러진 바닥이 아이들 매트가 깔린 바닥이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어쩔 뻔했나...
감기 증세가 없었는데 왜 갑자기 열이 올랐나.....
첫째는 이런 나를 보고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마음은 아프고 온 생각은 둘째뿐인데, 이상하리 마치 마음 한켠은 약간의 해방감이 있다.
아픈 새끼 놔두고 떠나는 어미가 이러면 안 되지 않나.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이 감정을 무어라 설명해야 되나.
13시간 비행
그리고 3시간 부산행 기차
이틀 만에 영상 통화로 본 아들은 얼굴이 약간 푸석푸석한 거 외에는 그래도 괜찮은 듯했다.
그리고 아이 얼굴 너머로 어머님이 보였다.
그날 괜찮았냐는 나의 물음에 남편은 갔다 와서 얘기하자고 얼버무렸다.
돌아와서 들은 얘기가 그날 경련을 5번은 해서 결국 새벽 2시에 응급을 갔노라고 했다. 혼자 못 버틸 거 같아서 어머님을 호출했다고 말했다. 5분 이상 경련이 이어지면 먹어야 되는 극약 처방약이 있는데 그게 약이 너무 강해서 우리는 한 번도 쓴 적이 없지만 병원에서 5번째 경련 때는 결국 그 약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약이 강하긴 했는지 한 이틀은 아들이 걸음을 바로 걷지를 못하더라며 병원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목이 멘다. 눈물은 이제 자동이다.
5번이나 했으면 얼마나 고생을 했을고.
고맙다. 그리고 고생했다.
나는 남편을 꼭 안아주었다.
내 한 몸 살자고 아픈 새끼 놔두고 떠나왔지만 니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8월 한국 여름은 찬란했고 우리 모자는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다른 한 곳에서는 우리 둘째는 오랫동안 엄마를 기다렸나 보다.
아들아. 언제까지 엄마 심장을 이리 두근거리게 할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