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영상으로 기록하기
연초에 우리 가족의 셀프 인터뷰를 찍었다. 가족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해두고 싶었다. 그냥 간단한 질문들에 각자 어떻게 답변하는지 담았다. 같은 질문을 매년 하면서 우리의 답변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지켜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콘텐츠 몇 개.
https://www.youtube.com/watch?v=_wNsZEqpKUA
빌리 아일리쉬가 2017년부터 매년 배니티 페어와 동일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했다. 2021년의 인터뷰를 12월에 공개했는데 매년 좋았지만 이번 인터뷰가 특히 좋았다. 빌리가 그 사이 많이 성장한 느낌을 받았다. 이젠 각 질문에 더 솔직해졌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많이 편해 보였다.
빌리의 답변들도 좋았지만, 매년 동일한 질문을 하며 지난 답변들과 지금을 비교하는 이 포맷 자체도 영감을 많이 줬다. 특히 답변이 계속 쌓여갈수록 더 강력한 콘텐츠가 된다. 내년에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좋은 질문들도 많았는데, 앞부분에 유명한 사람이라 의미 있는 질문들 외에 누구에게 던져도 괜찮은 질문들을 몇 개 메모해두었다.
내년의 나에게 조언을 한다면?
내 커리어의 가장 큰 성과는?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힘들 때 의지하는 사람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Technology)은?
지금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베스트 프렌드?
기쁨을 주는 것?
자신을 강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
어른이 된 것 같은지?
https://15min.kr/videobooth_detail
록화소는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서비스였는데, 컨셉이 재밌었다. 무인 영상 기록형 팝업 부스로, 몇 개의 질문을 던지면 셀프 인터뷰로 답하는 형식이다. (22.3.19까지 서촌에서 운영)
사용자는 부스 안에 들어가서 키워드를 선택하면 관련된 질문들이 나오고 그에 답변을 한다. 이 과정이 영상으로 기록되고, 편집을 마치면 전달된다.
대단한 이야기를 남기기보다는 각자가 주인공인 인생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담은 개인 소장용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방송인이나 크리에이터가 아니어도 보통의 우리들도 다큐나 인터뷰를 남길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키워드 별 예시 질문:
과거 -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인가요?
현재 - 요즘 나는 잘 웃는 사람인가요?
미래 - 나의 장례식에서 무슨 이야기를 남겨두고 싶나요?
성장 - 내가 가진 능력 중 앞으로 더 발전시키고 싶은 것은?
관계 - 5년 후 내가 타인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흥미 - 내가 꾸준히 좋아하는 게 있나요?
요즘 가장 재미있게 보는 최애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은 다큐를 소재로 하고 있어서 '기록'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드라마 소개말에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도 기록이 되면 이야기가 된다"는 말과 함께 다큐의 의미를 다룬다.
인상 깊게 봤던 장면 중 하나는 3화에서 지웅이 다미에게 휴먼 다큐 섭외를 위해 설득하는 말이었다.
네가 생각하기에 휴먼 다큐에 나오는 사람들은 왜 출연을 결심하는 것 같아? 섭외할 때 난 항상 솔직하게 얘기해. 우리가 당신께 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고. 지금 당신 인생의 한 부분을 기록해주는 거.
맞아, 이렇게 말하면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들이 대부분이지. 그런데 그걸 찍고 나면, 그리고 그걸 영상으로 볼 수 있게 되면, 그때서야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돼. 내 인생에서 순간을 기록해 간직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값진 건지.
난 이미 다양한 기록을 하며 살지만, 주로 사진, 그림, 글이었고 영상의 형태로는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좀 쑥스럽기도 하고, 전문가의 영역 같기도 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콘텐츠들을 통해,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영상으로 내 삶의 일부를 값진 순간으로 기록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시간이 누적된 기록의 힘은 강력하다고 생각했다.
록화소와 빌리 아일리쉬의 인터뷰를 참고하여 우리 가족에 맞추어 다시 포맷을 만들었다. 나와 남편과 아이가 같은 질문에 각자 어떻게 답변하는지, 그리고 매년 그 답변이 어떻게 달라질지 기록하고자 했다.
아이는 올해 한국 나이로 다섯 살이 되었는데, 지난해 언어가 급격히 발달했다. 그 과정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이제 아이는 인터뷰가 가능한 언어능력을 어느 정도 갖췄다. 질문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자기가 생각하는 답변을 할 수 있다. 물론 아직 잘 못 알아듣는 질문도 많고 엉뚱하게 답변하는 것도 많지만, 그 자체도 너무 귀엽고 재미있다. 점점 아이가 크는 과정을 기록할 수 있어 좋았다.
1월 9일에 촬영하고, 지난 주말에 편집을 완성했다. 즐거웠다. 완성된 영상은 너무 개인적이라 공개할 수는 없지만, 작업하며 재미있었던 순간을 몇 개 공유해본다.
아이의 답변이 예상을 깨는 경우가 많아 재밌었다. 예를 들어, '나의 꿈은?'이라는 질문에 '애기. 처음부터 애기가 되고 싶었어.'라는 답변이 귀여웠다.
인터뷰 중간중간 아이의 추임새가 활기를 더했다. 예를 들어,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질문에 내가 '책임감'이라고 답했더니 아이가 '아닌 거 같은데'라고 카메라 뒤에서 말해서 내가 적잖이 당황했다. 아마 어른들끼리 인터뷰했으면 없었을 변수들 같아서 더 생동감이 느껴졌다.
질문에 답변할 말을 따로 준비하지 않고 다들 즉흥으로 답변했다. 나도 질문지를 만들기는 했지만 답변을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몇 개 질문은 말문이 좀 막혔다. 하지만 내가 어떤 질문을 어려워하는지도 알아갈 수 있어서 좋았다.
남편은 거의 모든 질문에 '시언이 수연이'라고 답변했다. 단순한 사람. 매년 같은 답변을 할까 봐 걱정된다.
다음은 가족들과 나누었던 질문 리스트. 빌리 아일리쉬와 록화소 질문 예시와 다양한 서비스의 질문 카드 등을 참고했다.
이름?
나이?
나의 SNS 소개 말은?
나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
내가 꾸준히 좋아하는 것?
요즘 가장 힘든 것?
나의 꿈은?
올해 바라는 한 가지는?
내년의 나에게 조언을 한다면?
그리고 몇 가지 참고사항과 팁
나의 영상 실력은 초보에 가깝다. 영상 편집은 몇 번 해본 적 있으나, 좀 서툴다.
별다른 장비가 없어서 아이폰으로 찍었다. 러프하게 찍어도 상관없고 아이폰 화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편집하면서 보니 소리가 일정하지 못한 건 아쉬웠다. 영상을 보면 엄청 초보자 같다.
iMovie로 편집했다. 리소스를 최소한으로 쓰고 싶어서 iMovie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렌더링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오류가 나서 몇 컷에 글리치가 생겼다. 원인을 몰라서 더 수정하지 않았다. 이것도 결과물 보면 진짜 초보자 같다.
자막은 Sketch로 했다. iMovie에 있는 템플릿 쓰려고 했는데 트랜지션이 맘에 안 들어서 따로 만들었다. 포토샵을 쓰기엔 너무 무겁고, 키노트보다는 Sketch가 편해서 그냥 나에게 익숙한 도구를 쓴 것뿐. 그래픽 툴을 평소에 안 쓴다면 키노트를 써도 상관없을 것 같다.
**너무 애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연히 욕심난다. 영상은 손을 많이 볼수록 좋아지니까. 근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리소스*만 들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안 그러면 내년에 또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촬영은 30분도 안 걸렸고, 편집은 4일 정도 썼다.(풀타임 아님. 평일 육퇴 후 2일, 주말 2일)
내년에도 또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