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이 정상입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참으로 현기증이 나는 시대다.
성장은 더뎌졌으나, 변화는 더 빨라진 듯하고, 뭔가 마음 붙이고 뿌리내릴 곳이 만만치가 않다. 주변을 둘러보면 그래도 다들 그럭저럭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이렇게 적응 못하고 멍 때리고 있는 걸까?'
일본 최고의 전략 컨설턴트 중 한 명인 야마구치 슈는 철학과 예술을 바탕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공감과 통찰을 전하는 작가이자 Guru(스승)이다. 경기 침체, 성장 둔화, 불황, 리세션, 퍼펙트 스톰... 요즘 뉴스에서 많이 보이는 단어들. 누구도 정답을 가지고 살지 못하는 이 시기에 그의 책들을 통해 '성장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위안을 얻게 된다.
제목부터 솔깃한 그의 최근 책들은 이러하다.
그들은 어떻게 지적 성과를 내는가? (2015년)
읽는 대로 일이 된다.(2016년)
세계 리더들은 왜 직감을 단련하는가? (2017년)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2019년)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2019년)
쇠퇴하는 아저씨 사회의 처방전 (2019년)
뉴타입의 시대 (2020년)
일을 잘 한다는것 (2021년)
How to 미의식 직감, 윤리 그리고 꿰뚫어 보는 눈 (2021년)
어떻게 나의 일을 찾을 것인가? (2021년)
감성과 지성으로 일한다는 것 (2022년)
그리고 비즈니의 미래 (2022년)
다작이 놀랍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목만으로도 족집게 도사처럼 흔들리는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하다. 초일류 대기업들 조차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저성장과 적자,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2023년, 우리는 이제 어떤 비즈니스 또는 일을 해야 하는가?
"성장이 멈춘 게 아니라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책을 읽으며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최근까지 지난 20여 년 경영계획, KPI라는 이름으로 말 못 할 긴장 속에 늘 쫓기며 치열하게 살았던 나의 30대, 40대가 한 편의 영화처럼 지나갔다. '예전처럼 고성장을 못하는 것이 내 잘못(?)은 아니었구나...' 묘한 위로가 되었다.
인류는 최근 200년간 눈부신 발전을 이뤄왔다. 1인당 GDP는 국가별로 10배에서 수십 배까지 상승했다. GDP 성장의 근간에는 생활 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제공하는 것이 있다. 그렇게 많은 양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며 빈곤이 사라지고, 빈곤에서 발생하는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걱정이 줄어들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물질적인 생존 조건의 확보'라는 과제는 이미 완수했다. 고대 이래로 사회적 과제였던 '물질적 빈곤'은 거의 해소되었다. 물질적인 풍요가 일상이 된 이 시대, 우리는 과연 심신이 풍요로운 유토피아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다시 저성장, 침체, 쇠퇴, 대 전환기 등등을 운운하며 성장하지 못하는 스트레스에 사로잡혀 있다.
두괄식으로 얘기해 보자면, 지구의 자원과 환경은 한정이 되어 있다 보니 국가는 언젠가 어느 시점에 성장을 멈출 수 밖에 없다. 성장이 멈추는 것은 오히려 문명의 완성으로 볼 수 있고,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은 그만큼 문명화되지 않았음을 역으로 의미한다. 문명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늦어지고 있으므로 성장률이 높은 것이다. 이렇게 성장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며 세계를 인식하고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고 세상의 모습도 180도 달라진다. 처음부터 고성장 저성장 두 가지 상태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종용하면 당연히 고성장이 좋다고 대답할 수 빆에 없다. 이를 조금 바꿔서 미숙과 성숙으로 선택하게 하면 대부분 성숙이 좋다고 할 것이다.
이 성숙의 시대에 발상의 전환을 이뤄내기 위해서
세 가지가 중요하다.
우선 종말의 수용이다. 전환기는 뭔가를 시작하는 시기가 아니라 뭔가를 끝나는 시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기술의 힘으로 경제 성장으로 물질적 빈곤을 없앤다는 미션이 끝났다.
둘째는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장이 멈추는 것은 곧 문명의 완성, 오히려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 지 정립되지 않은 채 그저 성장에만 집착하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 오히려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전환기 극복을 위한 '새로운 게임'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물질적인 불만을 해소라는 게임을 종료한 상태지만 삶과 일에서 느끼는 보람 같은 의미적 가치, 즉 비즈니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적 과제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편리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장소는 되었지만 아직도 '진정으로 풍요롭고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회'를 향한 대전환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맞닥뜨릴 위기는 경제적 쇠퇴와 물질적인 부족이 아닌 의미의 상실일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야마구치 슈는 '지난 20년간 집착해 온 편리하고 쾌적한 세계에서 -> 살아갈 가치가 있는 세계로 바꿔나가는 것'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달리 표현하면 '경제성장성(효율성)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사회'에서 -> 인간성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사회'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압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문명을 위해 자연을 희생해도 어쩔 수 없다'는 문명주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도 어쩔 수 없다'는 미래주의
'성장을 위해 인간성을 희생해도 어쩔 수 없다'는 성장주의
그동안 우리는 묵시적으로 내일을 위한 오늘의 희생을 당연시해 왔다. 참고, 인내하며 정상을 꿈꾸어 왔다.
그런 희생을 통해 만든 기술 혁신으로 사회적인 니즈가 크고, 영향력이 큰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해결해 왔고, 이제 더 이상 그런 효율적인(?)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 여전히 해결하지 않고 남겨진 작지만 의미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오히려 기술적 현신을 이루어 갈수록 빈부의 격차는 커지고 사람들의 행복도와 생활 만족도를 훼손해 왔다.
야마구치 슈는 이해득실을 따지면 결코 뛰어들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충동'을 강조한다.
돈을 버는 수단으로써의 일이 > 인간성에 기인한 충동을 자유롭게 행할 때 삶에 대한 만족감이 커지는 부분에 주목할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껏 간과해 왔던 '충동적 욕구'가 주목받기 시작하면 이전과 달리 위상이 커지며 잠재 시장이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이상 성장이 어려운 '고원사회'에서 이런 인간적 충동에 기한 한 욕구의 충족이야말로 경제와 인간성을 양립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인간성 복원의 시대엔 편리함보다는 풍요로움이, 기능보다는 정서가, 효율보다는 낭만이 더욱 가치 있는 요소로 요구된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성을 발휘해 각자의 영역에서 '도움이 되는' 일 보다는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해야 사회의 다양화가 진척되고 고유의 '의미'에 공감하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앞으로의 '일'은 괴롭고 피하고 싶은 노역이 아니라 오히려 레크리에이션에 가까운 행위, 지식, 기능,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활동으로써 일종의 상품처럼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을 말하고 즐거운 일이 상품이 되어 팔리는 인류사적인 전환기를 확신한다.
'마치 예술가가 충동으로 마음이 움직여 작품에 몰두하듯이 서민들이 각자의 활동에 관련된 물건과 서비스를 창출하는 사회'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활을 진정 풍요롭고 활기 있게 해주는 물건과 서비스를 구입하고 더불어 자신의 감성과 지성도 키워 나가는 사회'
'미래를 위해 현재를,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고 압박받거나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지 않는 사회'
'사람들이 경제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인생을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공공시설의 개발과 투자가 이루어지는 사회'
과연 예술적 충동은 일이 될 수 있는가?
문득 지난 20년 넘게 대기업에서 성장목표, 목표필달, 미달 시 비상경영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고민하던 시간이 떠올랐다. 매년 전년대비 공격적인 성장 목표를 경영계획의 기본으로 하고, 1월부터 경영계획 차질로 2분기부터는 비상경영에 돌입하곤 했었다. 산업에 따라 상황은 다를 수 있겠으나 비단 내가 다닌 회사의 모습만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성장이 어렵다는 인식이 없다기보다는 보고 듣고 배우고 주변이 모두 기존의 지표에 매몰되 있다 보니 어떤 경영자도 새로운 기준(대안)을 제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MZ세대들의 특성이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회사의 성장보다 본인들의 워라밸이 못지않게 중요한 그들. 저성장 시대에 태어난 그들은 미래를 위해서 오늘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회사의 직급이나 직책의 권위로 쉽게 통제할 수 없는 그들. 어쩌면 그들은 이미 감각적으로 고성장의(Instrumental) 한계를 깨닫고 '의미 있는 일'을 지향하는 자기 충족적인(Consummatory) 사회생활로 진입을 스스로 도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200년간 추구해 온 치열한 문명화 경쟁과 효율화로 벗어나지 못한 원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우리 중 어떤 일정한 사람들의 행동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조금씩 바뀜으로써 100년 후의 세상은 비로소 극적으로 변할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예술로써의 비즈니스를 추구 하는 것, 즉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향락적인 인생을 누리는 아티스트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일 속에 예술을 접목시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을 구현할 수 있는 두 가지 지점은 '미해결 상태로 방치된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 것'과 '살아갈 가치(문화적 가치)가 있는 사회로 만드는 물건과 서비스를 창출'의 두 가지 방향으로 볼 수 있다. 보편적인 문제가 해결된 사회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 두 가지밖에 없다. 이 두 가지 활동을 실천하려면 반드시 자기 충족적인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업과 예술, 노동과 놀이를 정반대 행위로 생각하지만 이는 실행 주체의 인식 방법이나 시각에 따라 어느 쪽도 될 수 있다.
사업가는 사익을 추구하고 예술가는 공익을 추구한다? 인도 국민기업인 타타그룹의 회장(Ratan Naval Tata)은 폭우가 쏟아지는 인도 델리 교외에서 두 자녀와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는 가족을 보고 '누구나 탈 수 있는 값싸고 안전한 자동차가 필요하다, '는 충동을 실행으로 옮겨 160만 원짜리 '타타나노'를 개발을 지시했다. '돈을 버는' 경제 합리성을 넘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예술가와 같은 마음으로 접근했다.
또 다른 예로 의학박사인 요로 다케시는 도쿄의 직장인들에게 1년 중 일정한 기간을 지방에 가서 밭일을 하는 것을 주장했다. 일부에서 웬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되물을지 몰라도 프랑스인들은 이 말을 '아, 휴가 말이군. 좋은데?'라고 전혀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 '밭일'은 노동이지만 '가드닝'은 놀이가 된다. 이는 노동이었던 낚시나 사냥도 마찬가지다. 과거 힘든 노동이었던 일이 현대 사회에서는 우아한 놀이로 바뀌었다. 반면 그 반대로 예전 귀족들만 즐길 수 있는 여가였던 연구, 창작, 집필, 스포츠 같은 활동이 오늘날에는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으로 인정받고 있다. 오늘날 노동과 놀이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주체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행위도 달리 정의된다.
헝가리 출신 미국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는 자신의 분야에서 큰 성과를 내고 있는 세계적인 명성의 예술가, 음악가, 작가, 의사, 경영자, 운동선수, 체스 선수 등을 인터뷰하며 서로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최고의 전문가들이 최고조로 일에 몰입하는 상태를 발견했다.
과정의 모든 단계에 명확한 과제가 있다.
행동에 대한 (그 자리에서) 피드백이 이뤄진다.
도전과 능력이 서로 어우러진다.
행위와 의식이 융합한다.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상념이 의식에서 쫓겨나간다.
실패에 대한 불안이 의식에서 사라진다.
자의식이 사라진다.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활동과 목적이 일체화된다.
결국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노동의 방식에서 충동적인 감성에 몰입하는 행동으로 전환하더라도 사회는 무기력하고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로 진화해 나갈 수 있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다양한 면에서 서로 다르지만, 한 가지 점에서 일치한다. 바로 자신이 하는 일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의욕을 불어넣어 움직이게 하는 요소는 명예나 돈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일의 기회 그 자체다." - 칙센트 미하이 <창의성의 즐거움 중>
90% 이상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여러 시도를 해보아야...
여전히 사람들은 보편적인 물질적 과제 해소가 완료되었음에도 여기에 계속 기웃거리고 있다. 이 주변에서 충족감을 얻지 못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자신이 열중할 수 있는 찾으려면 일단 뭐든지 해보는 것이다. 이 방법 밖에 없다. '소위 기존의 올바른 인생의 모습'에 얽매이게 되면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모든 행동을 거부하게 되면 혹시라도 우연히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이 푹 빠져 몰입할 수 있는 활동'을 접할 기회도 놓치게 된다.
인생은 낭비와 헛수고도 필요하다.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서는 인생을 발견할 수 없다." (Anne Morrow Lindbergh)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기가 그다지도 어려운 까닭은 아무리 머리로 생각해 봐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이것저것을 다양하게 시도해 본 다음에 신체 감각으로 파악해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더 이상 한 가지 직업으로 일생을 살 수 없는 시대에, 자신이 열중할 수 있는 일, 반대로 쉽게 흥미를 잃는 일을 여러 가지 시도해 보고 판단을 하는 것으로 그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비즈니스의 미래'를 읽으며, 지난 수년간 막연한 불안을 주던 더 이상 성장하지 않은 부담에 대한 담담한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노동(비즈니스, 일)의 의미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우리는 이미 그런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졸업이 불안하여 졸업을 늦추는 학생들, 어렵게 입사한 대기업을 수년만에 퇴사하는 대 퇴사의 시대,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는 N잡러, 프로 이직러의 시대, 부업이 주업이 되는 시대, 덕업일치로 소위 성공한 사람의 반열에 오르는 사람들, 보란 듯이 깨지고 있는 기존 성공의 방정식들, 그럼에도 여전히 성장과 KPI에 집착하는 20세기 고원사회의 사람들과 공존하고있다.
결국 비즈니스의 미래는 나의 변화
분명한 것은,
대다수 관심사를 해결해 주던 고성장은 이미 끝났다.
노동의 가치는 바뀌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해보지 않은 일에서 막연히 본인의 적성을 예단할 수 없다.
기존의 농업적 근면성에서 벗어나 예술가로 살더라도 사람들의 생각처럼 엉망인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
숙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창조적이고 충동적인 도전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사회적인 공감을 만드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작금의 답답한 기득권자들을 굳이 떠올려 오늘의 내가 감정적으로 충동적일 수 없다는 다양한 핑계를 대기보다는 가장 나 다운 하루를 보내는 것. 그렇게 그렇게 쌓여 새로운 길이 나고, 물이 모이고, 바다로 나아가는 것.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