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그리고 어떤 이야기]
비가 내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장면은 흑백으로 시작해 암흑, 으로 끝난다.
이미지보다 통각이 앞섰다. 통증은 복부에 힘을 준 채 모든 감각을 집중해야만 사라지고는 했다. 감시탑 조명을 피해 낮게 웅크린 탈옥수처럼, 통증이 지나쳐가면 그는 안도했다.
여자는 저녁을 먹자며 오피스텔 건물 일식당으로 남자를 데려간다. 얼마 전에 생긴 집이야. 여자의 작은 손이 남자의 새끼손가락을 잡아당긴다. 잡은 손과 잡힌 손이 어색하다. 밥이라니. 차라리 술집에 가는 게 낫겠다고 남자는 생각하지만, 입 밖에 꺼내지는 않는다. 배 안 고프면 사케라도 마셔. 승강기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가는 동안 여자는 단 한 번도 남자를 돌아보지 않는다.
둘은 말이 없다. 남자는 초밥에 손대지 않고 차가운 정종만 홀짝홀짝 들이킨다. 가게 통유리에 그들의 모습이 비친다. 나란히 앉아 여자 반대쪽으로 다리를 꼰 채 몸을 돌려 앉은 남자, 그 옆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래도록 초밥만 쳐다보다 이윽고 하나를 집어 꾹 씹어 넘기는 여자.
그들이 처음 만난 곳도 일식당이었다. 그때 그들은 마주 앉았다. 고개 숙일 일이라고는 너무 웃어 혹 일그러졌을지 모를 표정을 감출 때뿐이었다.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시간이 보편적 시간에 비해 묘하게 뒤틀려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했다. 그 뒤틀림이야말로 그들의 관계였다. 시간의 굴곡은 서로에게 길들여진 정도였고, 굴절된 세계는 그들이 세상을 보는 렌즈였으며, 그 지치지 않고 그 시간을 가로지르던 힘찬 발걸음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원천이었다.
그들은 3주 만에 만나 얼굴을 보고 함께 저녁을 먹는다. 아니 한 달 만이었던가? 그동안 둘 사이에 몇 통의 메시지와 통화만 오갔을 뿐이다. 의무적으로 보내고 한참 만에 돌아오는 답장. 컬러링처럼 반복되는 대화. 뭐해? 그냥 있어. 너는? 나야 뭐, 늘 똑같지. 그리고…… 오래 고민했으나 하지 못한 말들. 불쑥 튀어 나올 뻔해 황급히 삼켜버린 말들.
언제부턴가 그들은 웃지도 마주 보지도 않았다. 서로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들만 둘 사이에 잔뜩 쌓였다. 일부러 속이려 감춘 게 아니라,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겼던 시간들이다. 반성과 고백과 용서가 필요한 일들이 아니었고,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원래 없었던 듯 사라지지도 혹은 넘쳐흘러 폭발하지도 않고 쌓여가기만 했다.
그 이물의 이야기들이 그들을 밀어냈다.
튕겨져 나왔다.
이제 그들은 한때 속했던 뒤틀린 시간에서 몇 발짝 물러서서, 그 휘어짐과 변형의 곡선들을 바라보며 낯설어한다, 그들의 자리가 어디였는지 궁금해한다.
둘은 식당을 나와 건물 밖으로 나온다.
비가 내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장면은 늘 흑백이다.
흑백의 여자가 흑백의 남자를 따라 암흑으로 향한다.
어쩌다…… 남자는 궁금해진다.
어째서…… 여자는 묻지 않을 거라 다짐한다.
둘은 내내 침묵함으로써, 몇 번이나 말하려 했고 불쑥 튀어 나올 뻔해 황급히 삼켜버렸던 말들을 모두 쏟아낸다.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맞는 걸까?
여자의 걸음이 느려진다. 흑백의 여자가 흑백의 남자를 돌려세운다.
가지 마.
남자는 여자의 표정을 쳐다본다.
돌아서지 말라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라고!
분명 남자는 가만히 서 있는데, 여자의 표정이 멀어진다.
마지막이잖아. 그러니까......
흑백인 여자의 얼굴과 가슴과 왼쪽 팔과 두 다리가 지워진다, 그리고 잠식당한다.
가지 말라고!
암흑.
남자는 가끔 암흑 위에 질문을 던져놓고는 했다.
그게 맞는 일이었을까?
시간이 오래 지나며 남자는 그들이 튕겨져 나왔다고 여겼던 그 자리가, 실은 그들이 뒤틀려 있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의 굴곡 중 일부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자신이 던진 질문의 답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드물게 그 장면을 떠올리며 통증을 느꼈다. 통증은 복부에 힘을 준 채 모든 감각을 집중해야만 사라지고는 했다. 감시탑 조명을 피해 낮게 웅크린 탈옥수처럼, 통증이 지나쳐가면 그는 안도했다.
* 레비파티(Levi Party) - 아픔을 지날 때(Feat. 고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