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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e Sep 06. 2015

침대맡 벽지의 검은 얼룩

[일상의 틈에서 잠시 바라보다 #3]

  사진 몇 장이 바다를 건너왔다. 


  몇 해 전부터 제주에 머물기 시작한 지인이 휴대폰으로 보낸 사진들로, 한치물회, 전복뚝배기, 제주 흑돼지 같은 음식들이 꽤 먹음직스럽게 찍혀 있었다. 사진 다섯 장을 무방비 상태로 받고 의아해하던 나는 그녀가 마지막 보낸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이래도 안 올 테냐?!


  그녀는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국내의 한 통신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지금은 다른 사업을 꾸려가고 있다. 그녀는 수완이 꽤 좋은 편인지, 회사에 다녔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초고속으로 승진을 해 경력이나 근무기간에 비해 꽤 높은 직책에 있었다. 지인들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그녀는 언제나 진취적이고 창조적이었으며, 적어도 자신이 하기로 마음먹은 일은 멋지게 해내고야 마는 그런 성격이었으니까. 


  그녀가 초고속 승진을 하며 회사에 다니던 바로 그 무렵에 내게 제주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나 제주로 갈 거야.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고, 제주로 발령 신청을 낼 거라고 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반신반의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생각조자 제대로 못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녀의 전화를 받는 동안, 그녀 회사의 경쟁사 쪽의 휴대폰을 구입하고 있던 중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지금 뭐하고 있냐고 묻지 않기만을 바랐는지도 몰랐다(참 소심한 영혼이다).


  그 통화를 한 뒤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녀는 정말 제주로 건너갔다. 바다를 보며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직 사택이 나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으며, 지금은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중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나는 그녀와 나와 제주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와 나와 제주의 인연이 이게 처음은 아니었던 거다.






  종종 그런 때가 있다.

  오래전 연락이 끊긴 지인들이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그들에게서 불쑥 연락이 오거나, 우연히 책장을 넘기다 옛 연인의 사진을 발견했는데 길을 걷다 그 혹은 그녀를 만나는 경우, 또 이런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때 말이다. 


  오래전 어느 9월, 불쑥 걸려온 그녀의 전화를 받았을 때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에 나는 잠시 머물 생각으로 제주에 가 있었으며, 그 '잠시'가 무기한 길어져 몇 개월째가 되던 즈음이었다. 그녀가 제주로 옮겨가기 몇 해 전의 일이기도 하다.


  휴대폰 액정에 뜬 그녀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반가운 마음과 의아한 마음이 교차했다. 내가 알기로 그때 그녀는 저 멀리 유럽 어디쯤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돌아온 것일까? 수화기 너머의 그녀는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얼마 전에 한국에 돌아왔으며, 아직 여행의 열병에서 깨어나지 못해 일상에 적응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그 열병에서 깨어나고 싶지가 않다는 거야.”


  전화를 끊고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는 내내 나는 조금 허둥대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녀에게서 전화가 오기 직전 우연히 그녀의 안부를 궁금해하던 참이었던 거다. 그렇게 된 데에 딱히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어서 나는 더욱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들은 떨쳐버리기로 했다. 굳이 크리스마스나 기념일 혹은 연말 연초처럼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날이 아니더라도 이 지구에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동시에 외로움을 느끼는 그런 시기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외로운 존재들의 제각각 다른 주파수가 우연히 맞으면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거겠지. 


*

 

  공항에서 만난 그녀는 청바지에 하얀 민소매 셔츠를 입고 오른쪽 어깨에는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메고 있었다. 마치 지금 막 길고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 같았다. 그런 느낌은 차림새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저 먼 나라의 모래먼지들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실제로 그녀에게서는 모래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영국에 있었어. 아는 친구가 이미 영국에 나가 있었고, 그 친구 신세를 졌지. 일을 하기도 했어. 새로운 장소, 새로운 기분. 그런 것에 적응하다 보면 나라는 존재를 잊게 돼.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잊듯이 말야.” 


  해수욕장 근처 횟집에서 회는 건드리지도 않고 소주만 연신 마셔대던 그녀가 말을 꺼냈다. 나는 그녀를 쳐다봤다. 한국을 떠난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까? 새로움을 찾기 위해. 우리는 횟집 앞에 펼쳐진 평상에 앉아 회와 매운탕을 먹으며 소주를 목으로 넘겼다.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과 늦은 해수욕을 사는 사람들의 소리가 저 멀리서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하지만 인간이란 참으로 무서운 동물이야. 그 이국적인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더니 낯익게 느껴지기까지 하더라구. 그리고는 내 안에 뚫린 구멍 안에 점점 잠식되는 느낌이었어. 완전히 소멸할 거 같은 기분. 딱히 기분 나쁠 일이 없는데도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공허하고, 외롭고.”


   그래. 그런 상태는 나 또한 충분히 이해한다. 딱히 이유가 없는 데도, 검은 물처럼 음습한 기운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해 밖으로 쏟아질 것처럼 넘실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음에도 외로움을 느끼는 게 사람이라지 않은가? 아마 모두가 내면의 구멍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떠돌았어. 조금 익숙해지면 다른 곳으로 떠나고, 또 떠나고. 그러다 아프리카로 갔어.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었어. 자연의 상태 그대로를 느끼고 더 자연에 가까워지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어.”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우리가 앉은 자리에 길들여짐을 느끼고 있었다. 딱딱한 평상, 그 위에서 졸아붙은 매운탕과 소주잔. 그리고 적당한 크기로 차분히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


  “그렇게 오래 머물던 어느 날, 숙소의 침대 옆 벽지를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늘 얼룩이라고만 여겼던 그게 사실은 누군가 아주 작은 글씨로 적어놓은 글귀더라고.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그게 한글이라는 거였어.”

 

  하긴 외국 어디에서도 한국 사람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에도 한국 관광객이 써 놓은 글귀를 발견할 수 있다고.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더라.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그 글귀를 보는 순간,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고 머무는 것.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들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녀가 한국행을 결심했다는 것은 비록 아프리카를 떠나는 것일 테지만, 원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균형 잡는 일을 몸으로 터득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녀는 며칠 동안 제주에 머물렀다. 

  한라산을 등반하기도 하고, 제주 경마장에서 열리는 말 축제에 다녀오기도 했다. 바다로 나가 손낚시를 해서 매운탕을 끓여먹기도 하고, 제주 시내에 나가 물회에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나는 평소에도 그녀와 대화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는데, 그건 그녀가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와의 대화에는 늘 아주  오래전 인간보다 먼저 이 지구에 살았던 존재들과, 우리가 앉은 곳을 지나다녔을 전차들, 그리고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하나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는 우도로 향했다.

  우도로 들어가기에 날씨는 아주 쾌청했다. 배를 타고 가는 내내 그녀는 파란 바다와 하늘만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우도에 도착해서 스쿠터를 하나 빌린 뒤 느긋하게 우도 곳곳을 돌아다녔다. 서빈백사를 지나 우도 동굴에 가서 마침 진행 중이던 음악회를 보고 다시 해변으로 돌아와 맥주를 마셨다. 그녀는 내일 돌아갈 거고, 그러면 또 오래 만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늘 그래 왔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 여기서 살고 싶어.”


  나는 무심결에 그녀를 쳐다봤다.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빛은 흐리멍덩해져 있었다. 그건 그녀가 이미 이 섬에 사로잡혔으며, 곧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뜻했다. 어쩌면 그 순간, 나는 조금 당황하거나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한 존재에 불시에 사로잡힌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그것은 매혹적이고 아름다우나, 가끔 치명적인 상처를 동반하기도 하니까.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도중 나는 그녀에게 스쿠터 타는 법을 가르쳤다. 그녀는 혼자 타 보고 싶다며 스쿠터에 올라타더니 저 멀리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이십 분이 지나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하는데 저 멀리서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나타났다. 






  그 뒤로 그녀를 딱 한번 만났다.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제주에서의 생활을 접고 돌아온 지 2년째 되던 해 여름이다. 우리는 곱창집 바깥에 마련된 파라솔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내가 섬에서 보았던 그녀의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이미 그녀는 회사에 취직을 한 상태였고, 많은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그날 그녀가 우도에서의 이야기를 했다.


  “그때 혼자 스쿠터를 타고 가서 엉엉 울었어.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울음이 나왔어. 그냥 바다가 아름답고 섬이 아름다워서.”

 

  그랬던가? 

  

  “그 날부터 제주 생각 많이 해. 나 꼭 제주에 다시 갈 거야.”

  

  그 뒤로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끔 메시지나 엽서, 그리고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정말로 발령 신청을 내 제주로 갔다. 그곳에서 잘 지내는 거 같더니, 별안간 회사를 그만두고 아프리카로 훌쩍 떠났다. 그 뒤로는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게 몇 년 전 일이다. 그러더니 급기야 작년에는 서울 어딘가에 아프리카 전문 여행사를 차렸다. 직접 두발로 걸어 몸소 확인한 곳만 상품으로 내놓는다던 그녀의 말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다른 게 아니라, 그 자신감은 떠났다 돌아오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얻은 균형감각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제주에서 지내며 제주와 서울과 아프리카를 떠났다 돌아오기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진행 중이던 많은 일이 거의 끝났고, 제주에 한번 놀러 갈 생각이라고 답장했다. 그러자 그녀가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곳에서 좀 더 편한 얼굴로 지내고 있을 테니, 꼭 이곳에서 만나. 

  내 빈곤한 마음을 J씨의 제주도가 달래 주었던 것처럼, J씨가 찾아오면 나의 제주도가 달래 줄 테니까.

 

  어떻게 답장을 할까 고민했다. 많은 말을 하고 싶었던 거 같은데, 문득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잘 지내라고 답장을 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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