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콘으로 읽는 미국문화] 킴 카다시안과 밀레니얼
미국의 방송인 킴 카다시안은 힐튼 호텔 상속녀 페리스 힐튼의 비서였으며, 섹스 비디오로 이름을 알렸고, 퇴폐적인 이미지로 점철된 비호감 연예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호감 이미지의 타격이 거세지면, 인기가 꺾이고 역사 속으로 쉽게 사라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킴 카다시안의 리얼리티쇼는 장기 흥행한 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넷플릭스 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엄청난 팔로우를 모았고,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하며 거물이 되었습니다. 쏟아지는 비난과 비호감 이미지에도 킴 카다시안은 어떻게 많은 팬을 모을 수 있었을까요?
킴 카다시안은 연예인과 인플루언서의 경계를 허무는 데 앞장섰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새롭게 등장한 인플루언서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킴 카다시안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적 인물입니다.
킴 카다시안은 2015년 <타임> 100대 인물로 뽑혔고, <포브스>는 자산 가치를 17억 달러(2조 2200억 원)로 추정했습니다. 2019년에 속옷 브랜드 스킴스(SKIMS)를 만들어 단숨에 32억 달러 가치의 기업으로 끌어올렸습니다.
킴 카다시안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 강연도 했고 변호사 시험까지 도전하고 있습니다. 모바일 게임과 이모티콘, 옷, 화장품 시장에 진출한 킴 카다시안의 브랜드 파워는 얼마나 확장될까요?
밀레니얼 세대가 낳은 아이콘
킴 카다시안의 쇼가 흥행하고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배경에는 자신을 킴 카다시안과 동일시하는 밀레니얼 여성 팬이 버티고 있습니다. 새로운 쇼를 시청해 주고 신상 제품을 소비해 주는 팬들의 전폭적인 성원을 받으며 킴 카다시안은 밀레니얼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등극했습니다.
미국의 밀레니얼은 높은 출생률과 경제적 번영을 누린 베이비붐 세대의 자식입니다.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 사이에 태어나 인터넷과 함께 성장했기 때문에 SNS와 스마트폰에 익숙합니다. 밀레니얼은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 페이스북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인플루언서 경제를 만들고 다지는 주역이었습니다.
전 세계 인플루언서 마케팅 시장은 기하급수적으로 확장하면서 2022년에는 164억 달러(21조 3900억 원)의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이 시장에 누구보다 먼저 뛰어든 사람이 킴 카다시안이었습니다. 원조 격인 마이스페이스에서 시작해서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까지 관리하며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킴 카다시안은 팔로워의 숫자가 곧 돈이 되는 인플루언서 시장의 논리를 빠르게 습득했습니다. 킴 카다시안은 인스타그램에 포스트를 올려주는 대가로 최대 100만 달러(13억 원)까지 받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리얼리티쇼 회당 출연료를 훌쩍 넘는 수준입니다.
인스타그램에 3억 4800만 명, 트위터에 7500만 명 팔로워를 자랑하는 킴 카다시안이 포스트를 올리면 순식간에 ‘댓글과 좋아요’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 인터뷰에서 킴 카다시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상품을 팔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거나, 무슨 색깔로 골라야 할지 모르거나, 구체적인 조언이 필요할 때 SNS는 빠르고 적절한 반응을 알려 주잖아요. 굳이 쓰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SNS의 가치를 일찍 깨달은 킴 카다시안은 팬을 늘리기 위해 더 노골적 이미지를 올립니다. 팔로워 늘리기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튀어야 했습니다. 킴 카다시안은 몸매를 드러낸 옷차림으로 패션쇼에 나타나고, 명품을 입고 야한 포즈로 셀카를 찍어 올립니다. 명품과 돈을 밝힌다고 조롱한 사람도 많았지만, 솔직한 표현이라고 공감한 밀레니얼도 많았습니다.
나쁜 경제로 저주받은 세대
대공항 이후에 경제적으로 가장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미국의 밀레니얼은 ‘저주받은 세대’로 불립니다. 밀레니얼은 더 가난해지고 부의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35세 이하 미국 성인의 자산 가치는 1996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해서 2019년까지 34%나 축소되었습니다. 1989년에 소득 상위 20% 미국인이 전체 부의 61%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2021년에는 70%로 늘어 빈부 격차가 악화했습니다.
밀레니얼은 비교적 풍족한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지만, 불경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자산은 쉽게 늘지 않았고, 줄일 수 없는 주거비, 의료비, 교육비의 지출 부담만 커졌습니다. 결혼이나 출산, 주택 마련마저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나 룸메이트와 사는 밀레니얼이 증가했습니다.
부의 결핍에 좌절하고 빈부 격차에 화난 밀레니얼 세대가 물신주의에 빠지게 된 건 이해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가질 수 없는 걸 욕망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일그러진 욕망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해소하는 방법이 SNS에 올리고 서로를 위로하는 거였습니다. 밀레니얼과 킴 카다시안은 이렇게 만나게 됩니다.
밀레니얼 세대가 제한된 소득으로 최대한 만족을 얻기 위해 찾은 방법은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뛰어넘는 ‘통합적 소비’였습니다. 이들은 최고의 상품과 서비스를 찾아서 컴퓨터에서 스마트폰으로, 스마트폰에서 오프라인 가게로 이동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CD에 익숙한 이전 세대와 달리 밀레니얼은 인터넷이나 스트리밍 음악이 가져온 신기술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87%의 밀레니얼은 하루에 3개 이상의 전자기기를 바꿔가며 쓴다고 합니다. 62%의 밀레니얼은 브랜드의 SNS에 참여하고, 42%의 밀레니얼은 상품이나 서비스 개발에 아이디어를 내는 일에 높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밀레니얼의 이런 성향을 잘 알고 있었던 킴 카다시안은 자신의 상품을 개발하는 데 팔로워를 이용해 수익을 냈습니다.
나르시시즘의 여왕
밀레니얼의 또 다른 특징은 독립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개인의 정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이기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자신을 차별화해 표현할 수 있는 옷이나 액세서리, 신발, 가구, 스포츠용품, 엔터테인먼트 등이 핵심 소비 상품입니다. 남들한테 잘 보이기 위한 명품 소비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 뒤에는 밀레니얼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이 존재합니다.
진 트웬지 샌디에이고주립대 심리학 교수는 개인적 성취감을 강조하는 문화적 변화에서 밀레니얼의 나르시시즘 성향이 강화된 이유를 찾습니다. 낮은 자존감이 폭력이나 마약 같은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고, 미국에서 80-90년대 불었던 ‘자존감 운동’도 이런 변화에 일주했습니다. 부정적 피드백은 차단하고 긍정적 역량을 살려야 한다는 사회적 환경이 밀레니얼을 나르시시즘 아이로 키웠을지도 모릅니다.
베이비붐 부모의 전폭적인 보호를 받으며 자아 존중감을 키웠던 밀레니얼은 스마트폰과 SNS를 만나 자기표현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네트워크 기술이 나르시시즘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활동 공간을 제공한 건 사실입니다.
어떤 옷을 입고, 무얼 먹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SNS에 공유하면서 자아를 표현합니다. 혼자만 보려고 셀카를 찍는 밀레니얼은 거의 없습니다. SNS에 셀카가 넘쳐나는 건 누군가 봐주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구독과 좋아요’로 인정받는 관계 속에서 나르시시즘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페퍼 슈워츠 워싱턴대 사회학 교수는 밀레니얼 세대가 우상화하는 킴 카다시안을 ‘나르시시즘의 여왕’으로 칭합니다. 2015년 킴 카다시안은 셀카만으로 352페이지를 가득 채운 책 <셀피쉬>를 출간했습니다. 원래는 남편 카니예 웨스트의 밸런타인 선물로 기획했으나 팬을 위한 선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자신의 특별함을 믿는 밀레니얼 팬들 사이에서 킴 카다시안은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자아 표현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나르시시즘의 허영을 채워 주는 패션 아이템까지 팔았습니다. 킴 카다시안의 이미지는 나르시시즘의 욕망을 채워주는 거대한 메아리가 되어 퍼져나갔습니다.
악명을 비즈니스 브랜드로
누구든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섹스 비디오 유출 스캔들도 킴 카다시안을 무너뜨리진 못했습니다. 킴 카다시안은 비디오에 대한 법정 공방을 이어가면서 그 관심을 자신의 리얼리티쇼 <카다시안 가족 따라잡기>로 돌렸습니다.
감추고 싶을 것 같은 비디오 내용을 첫 에피소드에서 언급하는 대담함까지 보여줬습니다. 그 때문인지 이 프로그램은 2007년부터 2021년까지 무려 20 시즌 동안 높은 시청률과 최장 방송 리얼리티쇼라는 기록을 세우며 자신뿐 아니라 카다시안 가족 모두를 스타로 만들었습니다.
남자친구였던 가수 레이 제이는 자신이 유출한 게 아니고 비디오 제작부터 킴 카다시안과 그녀의 엄마 크리스 제너가 관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것이 철저히 계획된 계산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관심과 부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캔들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무서운 소리입니다.
킴 카다시안은 2022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가상화폐를 불법 광고한 혐의로 126만 달러(3억 4000만 원)의 벌금을 내기도 했습니다. 가상화폐 홍보성 게시물을 올리면서 그 대가로 26만 달러(3억 4000만 원)를 받은 이른바 ‘뒷광고’였기 때문입니다.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이 하루가 다르게 강력해지는 시대에 킴 카다시안이 시사하는 바는 큽니다. 자신의 치부마저 성공의 발판으로 삼는 킴 카다시안의 상술에 많은 이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인기를 얻으려고 스캔들도 불사하고 무분별하게 행동하는 인플루언서가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인플루언서가 라이브 방송이나 투표 같은 방법을 동원해서 영향력을 강화할수록 중독적인 애착 관계에 빠져드는 팔로워가 늘어났습니다. 칼턴 대학교 사미라 파리바르 교수, 윌프리드로리어 대학교 팽왕 교수, 멜버른 대학교 오피러 투랄 교수 연구팀이 인스타그램 사용자 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는 시사점이 큽니다.
이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플루언서와 준사회적(parasocial) 애착 관계를 형성하고 공동체 소속감을 느낀 팔로어들에게서 부정적 영향 관계가 나타났습니다. 킴 카다시안처럼 사회적 매력도가 높은 인플루언서의 팔로어가 문제적 애착 관계에 더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준사회적 관계는 팔로워가 인플루언서와 일방적 관계를 맺고 자신을 그 공동체에 없어선 안될 핵심 구성원이라는 착각에 시달리게 하는 정신적 문제를 야기합니다. 스트레스, 불안, 우울증을 호소하는 팔로어가 증가하면서 이들의 정신 건강도 염려해야 할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가짜 팔로워를 사고파는 팔로워팜, 뒷광고 등의 문제점도 인플루언서의 해악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불운했던 밀레니엄의 세대의 지지를 받으며 미국 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킴 카다시안이지만, 조작과 속임수도 서슴지 않는 태도는 자신을 지지해 준 밀레니얼과 팬을 배신하는 일입니다. <포브스>의 제나 구드로 기자는 악명을 비즈니스 브랜드로 승화시켜 거듭난 대표적 인물로 킴 카다시안을 꼽았습니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제2의 카다시안을 꿈꾸며 인플루언서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습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을 브랜드로 발전시키고 SNS에서 증폭시키면서 사업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점에서 킴 카다시안은 현대 미국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림: 류정화
오마이뉴스에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