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동협 May 25. 2024

톱가수가 보여준 용기, 세상을 바꾸다

[아이콘으로 읽는 미국 문화] 미국을 대표한 목소리 빙 크로스비

▲ 영화 <홀리데이 인>에 출연한 빙 크로스비, 마조리 레이놀즈, 프레드 아스테어 ⓒ 파라마운트픽처스


영화 <홀리데이 인>에서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한 남자는 멋진 춤으로 다른 남자는 감미로운 노래로 유혹합니다. 춤추던 남자는 프레드 아스테어였고 "노래로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겠어요"라고 노래한 남자는 영원한 가수 빙 크로스비였습니다. 크로스비는 가사처럼 노래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슈퍼스타가 되었습니다.

크로스비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의 히트곡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노래를 히트시키며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는 공연과 음반에 만족하지 않고 70여 편의 영화와 2000여 곡의 노래를 녹음한 엔터테이너이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받은 배우였습니다. 부드럽지만 강인한 목소리로 희망을 잃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국 대중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목소리가 되기까지

크로스비가 1903년 워싱턴주 아일랜드계 가톨릭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을 때 누구도 그가 스타가 될 줄 몰랐습니다. 곤자가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아버지가 만돌린을 연주하고 가족들이 노래 부르는 환경에서 자라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중저음의 바리톤 음색으로 워싱턴주 스포케인에서 일찍부터 이름을 날렸습니다.

동료 가수 알 링커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진출해 보더빌쇼 순회공연을 시작한 지 1년이 되기도 전에 폴 화이트만 재즈밴드에 들어가 '리듬 보이스'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재즈의 거장 듀크 엘링턴과 빅스 바이더벡과 녹음하고 작곡가 어빙 벌린, 콜 포터, 호기 카마이클 등의 노래를 부를 영광을 누렸습니다.

크로스비가 대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시대의 변화를 읽고 적응할 줄 아는 민첩한 재능 때문입니다. 그는 나이트클럽과 극장에서 공연하면서 마이크가 잔잔한 목소리와 감정을 전달하는 최고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미묘한 감정의 변화까지 담아낼 수 있는 마이크의 기술력과 자신의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를 결합해 속삭이듯 노래하는 '크루닝' 스타일을 연마했습니다. 음악 평론가 헨리 플레즌트는 크로스비의 크루닝을 "자연스럽게 대화하듯 노래하는 새로운 음악 형식이 도래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크루닝 스타일을 완성한 그는 팝, 포크, 컨트리 등 다른 장르에도 도전해 성공을 거듭합니다. 신생 음반사 데카와 계약해 부른 노래들이 모두 흥행했습니다. 당시 음반사들은 대공황의 불황으로 어려웠지만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는 음반산업의 성공에만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크로스비는 엔비시 라디오의 '크래프트 뮤직홀' 버라이어티쇼를 맡아 10년간 진행하며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사랑받았습니다. 그는 딱딱한 연설 위주 목소리가 주도하던 당시 라디오 방송의 패러다임을 편안한 분위기로 바꿔 놓았습니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익숙한 목소리로 다가가 고통받고 지친 대중을 위로했고 대공황과 전쟁으로 어두웠던 시절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희망을 전달하는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크로스비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히트곡이 있지만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입니다. 어빙 벌린이 작곡해 1942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작은 마을의 어느 겨울날을 따뜻하게 추억하며 2차 세계대전의 절망적인 전쟁터를 벗어나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평화로운 고향으로 돌아갈 미래를 꿈꾸게 했습니다.

이 곡은 크로스비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사랑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중은 그가 낙천적이고 유머 넘치는 노래를 불러왔기 때문에 그의 삶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캐럴의 메시지와 그의 편안한 음성이 결합해 영원한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 곡은 매년 연말 뮤직 차트에 등장해 5000만 장 이상 팔린 역사상 최고의 싱글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예산업의 관행과 차별에 맞선 용기

작고 왜소한 체구의 크로스비는 연예산업의 관행과 기술을 바꾸는 데 앞장선 개척자였습니다. 당시 라디오는 생방송이었고 미국 동부와 서부 시간에 맞춰 똑같은 방송을 두 차례나 해야만 했습니다. 방송계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었을 때 애드리브가 많아 자신과 맞지 않았던 그가 용단을 내렸습니다.

법정 공방까지 간 끝에 비로소 미국 최초의 라디오 녹화 방송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방송사 제작 환경의 변화를 불러오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고 편집과 리허설이 가능해지면서 방송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빌보드>는 '유성영화의 도래 이후 가장 중요한 쇼비즈니스의 혁명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크로스비는 라디오 녹화방송의 핵심 기술인 존 멀린의 자기 테이프를 지원한 초기 후원자였습니다. 헨리 로우드 스탠포드대 교수는 "빙 크로스비는 실리콘 밸리 벤처 캐피탈리스트의 초창기 모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가 지원했던 자기 테이프는 디지털이 나오기 전까지 35년 이상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기술 혁신을 주도했습니다.

▲ 빙 크로스비와 루이 암스트롱이 영화 <상류사회>에서 펼친 재즈 공연은 인종을 넘어선 화합의 하모니를 흥겹게 보여줬다. ⓒ MGM

그는 기술과 장르만 넘나든 것이 아니라 인종도 초월하는 우정을 나눴습니다. 23살 되던 1926년 시카고 선셋 카페에서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을 만나 죽을 때까지 함께 작업하는 인연을 맺었습니다. 당시에는 인종 차별이 심해 백인과 흑인이 함께 작업하는 일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암스트롱의 공연을 보고 감명받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루이 암스트롱은 구슬픈 노래를 불러 사람을 울리고, 곧바로 다른 노래로 남부의 근엄한 설교자를 흉내 내 사람들을 웃겨 복도에서 뒤집어지게 할 줄 아는 변화무쌍한 재능의 소유자다."


크로스비가 진행하던 라디오에 암스트롱이 자주 출연하는 등 인연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1936년 크로스비가 주연을 맡은 영화 <페니 프럼 해븐>에 암스트롱이 조연으로 출연했습니다. 그는 암스트롱이 백인 배우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제작사에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영화 타이틀에 흑인과 백인이 나란히 이름을 올린 첫 사례였고 기념비적 사건으로 남아 다른 흑인 배우의 진출을 돕는 선례가 되었습니다.


크로스비와 암스트롱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미국 음악을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암스트롱의 흥얼거리는 스캣 창법과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재즈 리듬은 크로스비의 음악적 지평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암스트롱도 '스타더스트' 등의 노래를 크로스비의 감미로운 크루닝 스타일로 소화해 불렀습니다. 1955년 <타임> 인터뷰에서 암스트롱은 "빙의 목소리는 독특하고 부드러워 마치 잔에서 황금이 넘쳐서 흐르는 것 같다"라고 격찬했습니다.


두 거장은 영화와 노래를 함께 작업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크로스비가 그레이스 켈리의 연인으로 출연한 1956년 작품 <상류 사회>는 그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입니다. 암스트롱의 재즈 밴드를 소개하며 둘은 '나우 유 해스 재즈'라는 멋진 곡을 함께 부르며 춤추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암스트롱의 구성진 스캣과 트럼펫 즉흥연주는 크로스비의 스타일과 일치합니다. 그가 암스트롱과 크루닝하면서 어깨춤을 추며 어우러진 모습은 영화의 장면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회고합니다.


크로스비와 암스트롱은 영화나 라디오에서 노래를 함께 부른 것도 모자라 1960년에 '빙과 사치모' 공동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버라이어티>는 "목소리의 거장 둘이 만나 편안하게 부르는 노래가 주는 즐거움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크로스비가 암스트롱과 음악 작업을 하며 함께 웃고 신나게 떠드는 모습에서 대중은 시대를 앞서간 우정을 느꼈습니다.


빙 크로스와 루이 암스트롱 © 류정화


캐럴로만 기억되긴 너무나 아쉬운


온화했던 목소리와 달리 크로스비는 유약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예 산업의 관행을 바꾸는 변화에도 주저하지 않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안전한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신기술을 지원하는 위험도 감수했고 기술이 가져온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도 변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연설 마이크로 대화하는 크루닝을 시도하고 성공했으며 크루닝 스타일로 다른 음악 장르뿐이 아니라 라디오, 텔레비전 매체에도 도전하는 실험을 계속했습니다.


종교적 음악이 주도하던 엄숙한 캐럴을 대중음악으로 끌어들인 변화도 그가 주도한 흐름 중의 하나였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태도를 소유했기 때문에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문화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암스트롱과 함께 보여준 음악적 우정은 인종 차별에 굽히지 않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는 장르와 사회적 차별의 벽을 모르는 자유로운 만능 엔터테이너였습니다. 친숙한 대화로 대중과 소통하고 힘든 영혼을 위로할 줄 아는 언어의 마술사였습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노래로 포용하는 정겨운 이웃이었습니다. 그의 캐럴이 아직도 사랑받는 이유는 세상의 시련을 단숨에 잠재우는 마력의 목소리처럼 따뜻한 세상으로 인도하는 희망을 믿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크로스비가 죽은 지 40여 년 지났지만 그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팬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1936년에 설립되어 잡지 발간 등의 기념 사업을 하는 '인터내셔널 클럽 크로스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팬클럽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방탄소년단의 뷔가 크로스비의 팬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는 그룹 결성 10주년 기념 선물로 "It's beginning to look a lot like Christmas"를 크로스비처럼 재즈 밴드의 반주에 맞춰 멋지게 커버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크로스비가 캐럴 가수로만 알려졌지만, 그는 연예산업과 대중 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크로스비의 노래가 케이팝스타 뷔의 목소리로 다시 불리며 전 세계 팬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전달했습니다. 관습과 차별에 맞선 크로스비의 자세는 요즘 한국처럼 팍팍해지는 시대에 필요한 감수성이 아닐까요?



그림: 류정화

오마이뉴스에 기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