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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요한 연 Jun 09. 2021

8. 우도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섬에서, 넷째 날



  연약하지만 선명한 주홍색 혹은 푸른색 불빛이 노면에 줄지어져 걸음을 밝히고, 드문드문 연이어진 오렌지색 가로등 불이 시야를 비추는 우도의 밤거리는 무척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다.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관광객은 배를 타고 떠나버린 탓에 마치 이 섬에 나만이 남아있는 듯한, 남겨지거나 버려진 것이 아니고 그저 혼자 머물러있는 듯한, 몽환적이면서 고즈넉한 분위기가 가장 특별했다. 비록 그땐 혼자가 아니긴 했지만.

  여기서 세 달째 홀로 지내며 낮거리든 밤거리든 지겹도록 봤지만, 아무리 겪어도 그다지 지겹지 않다는 게 참 낯설다. 원래 모든 풍경이란 몇 시간만 지나도 식상하고 시시해지는 게 아니었나. 적어도 무덤 해지거나. 이 섬에만 누가 마법이라도 걸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쩌면 그 마법사는 나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8. 우도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그렇게 우리는 우도의 야경에 감탄하고, 줄곧 노래를 들으며 산책을 했다.  많은 노래를 들었던  같은데, 대부분 흐릿하지만 거의 메이저  곡들만 즐겨 듣던 J 위해 특별히  첫곡으로 선정해준 펀치의 'Stay with me' 하나는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뭐든 처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근본적인 사실도 그렇지만, 외에도 엄청 오랜만에 들은 노래라 반가웠고, 나름 최신곡(?) 임에도 불구하고 노래에서 풍겨오는 쓸쓸함 덕분인지 우도의 고전적인 정서와도 그런대로 어울렸기 때문이다.  뒤로는  핸드폰이 방전돼서 J 핸드폰으로 유튜브에 들어가 대충 'INFP 플레이리스트' 아무거나 골라서 틀었다. 제목에 INFP 어쩌고  들어가면 대개 선방이다. 그런데 마침 민수의 '' 흘러나와서, 내가  곡과 가수에 대해 추천하는 동안에 별안간 길을 잃어서 발이 푹푹 꺼지는 질퍽하고 삼엄한 논밭을 걷게 되느라 노래고 뭐고 정신이 반쯤 나가버리는  황당한 에피소드가  있었던  같은데, 이제는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하다. 사실 이게 첫날밤 산책이 맞는지, 혹은 둘째 날이었는지도  헷갈린다. 여러모로 이맘때를 적기도 애매해졌고. 그래도 자전거를 타며 우도를 거의  바퀸가  바퀴쯤 돌았던 기억은  적어두고 싶다.


첫 하하호호 수제버거. 이름처럼 웃음이 절로 나오는 맛.


  여기서 보냈던 날들은 분명 저마다 다르면서도,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면 주로 비슷비슷했다. 늘 아침 6-7시경에 일어나서 늘어져있다가, 차츰 정신이 완전히 말똥 해지면 행선지를 정한 뒤 씻고 점심밥을 먹으러 외출을(이르면 오전 11시경, 늦으면 12시나 1시) 한다. 거리에 따라 처음부터 가방을 들고나가 식사를 한 뒤 곧바로 카페로 이동하거나, 혹은 맨몸으로 나갔다가 밥을 먹고 다시 숙소에 돌아와 가방을 챙긴 뒤 카페에 가서 마감할 때까지(그래 봤자 최대 18시다. 장미칼퇴섬. 와 장미칼 개 오랜만.) 노트북을 붙잡고 있다가,  다시 가방을 숙소에 두고 나가 저녁밥을 먹고 돌아온다.(가끔 안 먹거나 술상으로 대체할 때도 있고) 그러고는 포켓볼과 맞고를 치다가 산책을 나가거나 나가지 않고는 거의 약을 먹고 약효가 돌 때까지 다시 게임하다가 기절하듯 잠든다. 날씨나 컨디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대강 그런 양식이다. 그래서 특별히 손꼽을 수 있는 날은 잘 없는데, 그중에 하나가 자전거였다. 이외에도 이 매거진은 이렇다 할 나날의 편린들만 따로 끄집어내 순서대로 이어가게 될 것 같다. 비록 초반의 계획과는 많이 달라져 버렸지만.... 하지만 뭐,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이마저도 안 지킬 것 같긴 하다.


자전거 위에서 찍었던 풍경들. 다들 균형이 좀 안 맞는다.

  나는 자전거를  타서  힘으로만 자전거를 움직였던 기억은, 아주 어릴 적에 보조바퀴를 달고 탔던 거나,  시기쯤 아빠가   자전거를 가르쳐주겠다며 종용해서 그걸 타다가 넘어졌는지 타기도 전에 무서워서 포기했는지, 아무튼 결국 엉엉 울면서 아빠와 진탕 싸우고는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던 기억밖에 없다.  뒤로는 시도도  했다. 비록 집에 자전거가 굳이  댄가 세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이걸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와 서는 자전거를 미리부터 배워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우도 , 후로는 시도 정도는  번했지만  실패했다.) 단순히 자전거의 편리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감수성이다. 털레털레 걸으면서 찬찬히 감상하게 되는 느린 풍경도 좋지만, 적당한 속력이 더해져 들뜨면서도 홀가분해지는 마음과, 걸음보다 훨씬 시원하게 거쳐가는 바람결과 함께 빠르고 짧은만큼 더욱 애틋하게 스쳐가는 풍경에는 그만하고 고유한 매력이 스며있었기 때문이다. 이인용 전기 자전거 뒷좌석에 편승해서  꿈결 같은 시간 속을 부유하듯 내달리며 나는  사실을 아주 오랜만에, 그리고 훨씬  깊숙하게 알게 됐다. 내가 자전거를   있었더라면 그걸 자주 겪을  있었을 테니 우도 생활의 질이 한결  상승하지 않았을까 싶다가도, 오히려 쉽게 겪지 못할 순간이니깐 더욱 소중하고 각별했지 않나 싶다. 그래서  후회까지는 없다.




  어느덧 약 이주 뒤면, 내 마지막 휴양지인 우도를 떠난다. 이제 여기 와줄 손님은 더는 없고, 여태 극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전거를 배울 생각이나 자신도 여전히 없고, 돌아간 내가 갑자기 한강에 가서 누구랑 이인용 자전거를 타고 있지는 않을 테니, 아마 이젠 다시 못 느껴볼 감정과 순간이었던 거 같다. 누구든 언제나 탈 수 있는 고작 자전거 가지고 이렇게 구구절절 쓰고 있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나한텐 희귀해서 특별했다. 한편으로는 배경이 우도여서 훨씬 더 색달랐다. 겨우 자전거 하나로 단시만에 섬 하나를 통째로 둘러볼 수 있다는 점이 정말 근사하지 않나. 심지어는 디디는 곳마다 아름답고, 드넓은 바다가 간헐적으로 등장하고. 아무튼 내게는 특별과 특별히 더해져 둥그런 별자리로 수놓아진 경험이었다.

  근데 이거 소제목은 밤거린데 정작 자전거 얘기가 더 길어졌다. 늘 그랬던 거 같지만.... 문득 자전거를 타면서 밤 풍경을 만나보지 못했던 건 적잖이 아쉽다. 그래도 아쉬운 만큼 빈자리도 남는 거니깐. 무엇이든 너무 빼곡하게 채워두면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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