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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꾸꾸 Oct 14. 2023

출발 - 마음껏 멍 때리기

<도쿄여행기 (2)>


멍 때리기가 필요한 현대인

이 그림을 처음 만난 건 책 <그림의 힘>에서였다.

로버트 던칸슨의 <골짜기 초원>

저 풍경 호숫가 돌부리에 앉아 풀을 뜯고 있는 양들과 음메에 하고 울며 두 눈을 끔뻑거리는 소떼들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면 마음이 차분하고 고요해질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미술치료를 온 사람들 중에 특히 의대생이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소개된 그림이었다. 이는 수험 생활에 이어 대학, 인턴, 레지던트 등 숨 가쁜 10년이 넘는 기간의 경쟁과 공부 속에 살며 무인도에 가고 싶다는 그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그리고 그들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의 일상은 하루종일 정신없이 울려대는 업무연락이나, 속 시끄럽게 하는 사람 간의 관계, 사소한 고민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다들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혼자 있고 싶다.’


그리고 그림의 ‘그’ 자도 잘 모르지만 일단 이 책을 샀던 건 그림을 보면서 멍을 때리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두 눈동자를 그림의 저 멀리 희뿌연 산 아래 호숫가에 고정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나도 아무 방해도,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껏 혼자 있고 싶다.’


작년에 그렇게 혼자 있을 때는 인어공주의 보라색 마녀에게 목소리를 빼앗길 것만 같다며 시끄럽고 바쁜 일상을 그리워했었는데, 막상 7일이 꽉 찬 쳇바퀴 일상을 살게 되니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나를 보며 참 간사하다는 생각도 했다.

어째 됐든, 지금 내가 있는 세계에서 훌쩍 떠나 사라져 버리고 싶었던 참에 드디어 휴가를 가게 되었다.


바깥세상 일들을 처리하는 데 온 생각을 집중해야 하는 평소에는 머릿속 요정들이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재잘거릴 수 없었는데, 오랜만에 머릿속 요정들이 마음껏 재잘거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골짜기 초원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녹음과 카페, 활기 있는 사람들의 재잘거림이 가득한 도시 도쿄에서 말이다.

도쿄타워와 오모테산도로 가는 길


출발

가장 설레는 건 공항 카페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바로, 출국 전에 공항 카페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학생 시절에 느꼈던 금요일 마지막 교시가 끝나기 전의 설레고 들뜬 마음과 사뭇 비슷하다. 여행으로 들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비행기가 줄지어 있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껏 멍을 때려도 좋다.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온전히 자유가 될 생각에 모든 것이 설레는 순간이다.


여행을 처음 다니기 시작했던 20대 초반의 출국 시간은 언제나 동이 트기도 전의 첫 비행기이곤 했었다. 최대한 빠른 출국과 늦은 귀국으로 꽉 찬 일정을 만드는 게 성공적인 여행계획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새벽비행기로 시작하는 여행의 첫날은 평소 출근할 때보다 더 정신없고 숨 가쁘단 것을 문득 깨달았다.

‘휴식을 위해 떠나는 여행인데, 어째 귀찮다는 생각이 드네?’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해야 ‘잘’ 여행한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출국 시간의 여유로운 커피타임이 하나의 여행계획으로 거듭나게 되면서 내 여행의 출국 시간은 차차 느지막한 점심 즈음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여행을 거듭하며 나에게도 나만의 여행의 이유가 생기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소소한 취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에서 비롯된 특별한 경험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이상적인 일상이다. 여행을 가서도 평소와 같이 공부를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평소에 나의 일상에 부족했던 2%가 채워진 일상을 누린다는 점이다.

여행에서는 피곤해도 꾹 참고 하루를 꽉 채워야 하는 대신, 잠시 햇살 좋은 카페에서 쉬어갈 수 있다. 배가 고프면 길을 걷다가 눈앞에 보이는 햄버거 가게로 바로 들어갈 수도 있다. 하루를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을 때 온전한 저녁을 만끽할 수 있다.

여행도 꽤나 바쁜 일정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사이사이에 작은 여백과 공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우리는 여유와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평소에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직장에서 에너지가 소진되면, 집에 와서는 잔뜩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는 것이 가장 달콤한 휴식시간이다. 일주일에 평균 6일을 꽉 채워서 일하고 있는 지금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이것이다.

‘주말이 2일만 되어도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을 텐데’

여백 없는 일상에서 내 머리는 항상 풀가동상태였기 때문에 멍을 때리면서 공상을 하고 상념에 젖어들 여유가 없었다. 참, 그래서 글쓰기도 어느새 돌아보니 두 달이나 멈춰있었다.


되돌아보니 사색의 시간이 부족했던 지난날들이었다. 사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서 거미줄처럼 영역을 넓히곤 하는데 한번 끊어져버린 이상 새로운 실타래를 치기 어렵다. 그리고 때로는 생각하는 것보다 아무 생각 없이 정신없이 하루가 흘러가 버리기를, 그리고 늦은 밤 잠시간에 찾아온 휴식시간에는 떠오르는 잡생각을 차단하기 위해 온갖 영상과 유희거리들로 공백을 가득 채워버리고는 했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이 쉬는 것이라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6개월이 흘렀고, 나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골똘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공항 카페. 왼쪽에는 아주머니 세 분이 재잘거리며 신나게 어떤 한 주제에 대해 열띤 수다를 떨고 있고, 내 앞쪽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에 열중하던 붉은 머리 서양 여성이 맥북을 꺼내 들고는 다시 무언가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마음껏 멍 때리고, 마음껏 사람구경을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세상 구경 좀 하자. 병원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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