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대가들』앤드루 램, 상상스퀘어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의학 지식들은 한때 알려지지 않다 못해 배척당하기까지 했었다. 예를 들어, 미국의 20대 대통령인 제임스 가필드는 등에 총격을 입은 뒤 의사가 소독하지 않은 손과 도구로 상처를 지속적으로 들쑤시는 바람에 이에 대한 패혈증으로 사망하였다고 추정된다. 때는 1881년이었다. 유럽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미생물과 균이 상처를 악화시킨다는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으나 미국 대다수의 의사들은 이를 무시한 결과였다.
생각해 보자. 환자는 대통령이었다. VVVIP라는 것이다. 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에게 이루어진 의학적 조치마저 안 건드리느니만 못한 때가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의학의 대가들』은 심장병, 당뇨, 세균성 감염, 바이러스성 감염, 암, 외상, 출산까지 7가지 주제를 가지고 현재의 수준이 도달하기까지 해당 분야의 의학적 발전 과정을 소개한다.
의학 지식과 기술의 발전은 때로는 누군가의 근면하고 집요한 연구 덕분에, 때로는 우연한 발견으로, 혹은 비참한 사건의 부수적인 결과로 이루어졌다. 저자는 이를 이끈 의사들과 환자들을 조명하며,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눈을 떼기 힘든 흥미진진한 의학 드라마로 독자를 인도한다.
이 드라마는 질투와 경쟁에 관한 이야기다. 과감한 시도와 결단을 내리는 용기,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다. 실패와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불굴의 의지, 인류 전체를 위해 아낌없이 연구 결과를 공유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재미있기만 한 게 아니라,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도 몰려온다.
책에 소개된 수많은 의학의 영웅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 소개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아치볼드 매킨도를 고르겠다.
아치볼드 매킨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영국군에 복무하던 뉴질랜드 출신 성형외과 의사이다. 당시 독일 공군의 폭격에 맞서는 과정에서 수많은 영국 공군이 얼굴을 비롯하여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 매킨도는 화상 환자에게 붕대를 감아 두던 기존의 치료법이 오히려 회복 중인 환자의 피부 조직을 뜯어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환자들 중 바다로 추락한 조종사들의 회복세가 빠르다는 사실에서 착안하여, 환자를 생리식염수로 목욕시키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또, 화상 부위 주변의 건강한 피부 조직을 늘려서 덮는 방법에서 더 나아가, 화상 부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부위의 건강한 피부를 이식하여 치료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획기적으로 발전된 피부이식을 받는다 해도, 환자들의 외형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매력적인 청년에서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한 젊은 장병들은 육체의 고통 이상으로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매킨도의 진가가 드러난다.
한편 매킨도는 이 치료에서 완전히 비외과적 측면에도 수술만큼이나 공을 들였다. 이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환자의 심리적 건강이 신체적 건강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p. 366)
매킨도는 마을 사람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화상을 입은 환자들이 마을로 나가면 마을사람들은 그들과 친절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하고, 함께 맥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춤을 추었다. 마을 어디에도 거울은 없었다.
마침내 병사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짓궂은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의연함까지 갖추게 된다. ‘기니피그 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든 것이다.
The Guinea Pig Club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With his encouragement, the Guinea Pigs did not hide away with their injuries, but instead led full, active lives.
그(매킨도)의 격려로, 기니피그들(매킨도의 화상 환자들)은 그들의 부상 때문에 숨는 대신, 충만하고 능동적인 삶을 살았다.
They challenged the existing perception that disabilities were life-limiting and went on to mentor new generations of burns victims, including Service personnel injured in the Falklands, Iraq, and Afghanistan conflicts.
그들은 장애인들의 삶은 한계가 있다는 기존에 널리 퍼진 생각에 도전하였고, 파크랜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부상을 입은 새로운 세대의 화상 피해자들에게 멘토가 되었다.
출처: https://www.rafbf.org/guinea-pig-club/about-the-guinea-pig-club
청년들의 환하고 아름다운 미소에서 빅터 프랭클 박사의 말이 떠오른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청아출판사, p.108)
매킨도는 몸과 마음 모두 살리는 의술을 펼쳐 보였다. 섬세하고 따뜻한 그의 마음 덕분에 그의 환자들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피해자에서 멘토로 변화할 수 있었다.
하나의 꼭지만 가져왔는데도 이토록 내용이 길어졌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계속해서 숨겨져 있던 영웅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수많은 의학적인 혜택들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혁신적인 의사들과 용감한 환자들(p.381)의 눈부신 용기에 빚진 것이다.
이 책은 의학에 집중함으로써 결국 어느 분야에서나 통용되는 중요한 원리를 도출해 냈다. 지금도 의학뿐 아니라 수많은 분야에서, 보이는 곳이든 보이지 않는 곳이든 자신의 일을 묵묵하고 꿋꿋하게 해 나가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책을 읽고 내 퓨처셀프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매 순간 배움을 통해 성장하여 주변 사람들과 속한 공동체, 이 세상에 공헌하는 사람. 초등교사인 나는 의학과는 아주 거리가 먼 직종에 몸담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수많은 분야의 대가들을 길러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다. 내가 만나는 어린이들이 OO의 대가가 될 수 있도록 아낌없이 격려하고 지원하자. 그것이 바로 내가 교육의 대가가 되는 길이다.
500쪽이 넘는데 완전히 몰두하여 불과 며칠 만에 완독했다. 이 정도의 흥미진진함과 인류를 향한 벅차오르는 감동, 그리고 내 삶의 방향성 재고까지 넘치도록 주는 책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이 책과 만나게 되어 그저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