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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지롭다 Apr 25. 2020

코로나 시국에 『페스트』 읽기

알베르 카뮈, 페스트, 문학동네

재앙은 인간의 척도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들은 재앙을 비현실적인 것, 곧 지나가버릴 악몽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 ~ 그들은 계속 사업을 했고, 여행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갖고 있었다. 미래와 여행, 토론을 금지하는 페스트를 그들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p.51)


‘페스트’를 ‘코로나’로 바꾼다면 현 시국에 대한 진단으로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문장이다. 194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3년 전,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를 출간했다.

서점에서 민음사와 문학동네의 책 두 권을 펼쳐 번역을 비교한 뒤, 문장의 의미가 더 잘 다가오는 문학동네를 선택했다.


평범하고 특출 난 데 없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오랑에 사는 의사 리외는 아파트 복도에서 죽은 쥐를 발견한다. 수위 미셸 영감에게 쥐 사체가 있다고 말하지만, 미셸 영감은 그럴 리 없다며 부정한다. 그러나 도시 곳곳에서 쥐 사체가 떼로 목격된다. 길거리, 하수도, 항구, 심지어는 유모차 안에서도 말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미셸 영감의 림프절이 부어올랐다. 증상이 생긴 지 단 이틀 만에 40도가 넘는 고열에 이르고,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다 죽고 만다. 그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환자가 속출하고, 리외는 이 전염병이 페스트임을 직감한다.




✔코로나 시대의 거울


현시대의 독자는 ‘페스트’ 가운데 있는 오랑 시민을 지켜봄으로써 ‘코로나19’ 한가운데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페스트』가 주는 대단히 큰 유익이다.


사실 재앙은 모두가 겪는 것인데도, 그것이 자기에게 닥치면 여간해서는 믿지 못하게 된다. (p.50)


Photo by Markus Spiske on Unsplash

1월 중순 즈음 우한 지역에 전염성 폐렴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들려오던 무렵, 이 질병이 우리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던 삶의 양식을 바꿀 것이라고는, 나 역시 믿지 못했다. 별일 없을 것이라고, 금방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한국 사회가 겪은 메르스, 신종플루, 사스 등 여러 전염병이 어떤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지나갔는지 세부적인 상황에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오랑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쥐 떼의 죽음이 그들에게 불러일으킨 것은 그저 고약한 냄새, 물컹한 쥐 사체의 소름 끼치는 촉감 정도였다. 그러나 미셸 영감의 죽음을 시작으로 전염병은 모습을 지위와 재산을 가리지 않고 희생자를 삼켰다. 불쾌한 감각은 점차 공포로 바뀌었다.


이외에도 현시대와 겹쳐 보이는 장면이 무수히 많다. 병명을 놓고 의사들과 도지사의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라든지, 발병 초기에 사람들이 개인적 관심사를 무엇보다 중시하며 행정 당국을 비난하는 부분, 농담을 하며 불안감을 숨겨오던 시민들이 사망자가 늘어남에 따라 낙담한 표정으로 말없이 거리를 다니는 부분, 두 자릿수의 환자에도 기겁을 하던 사람들이 날마다 수백 명이 죽어도 크게 반응하지 않는 모습 등은 지금 주변을 둘러보기만 해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카뮈가 그린 인간군상


의사 리외는 이 전염병이 페스트임을 밝혀낸다. 사망자가 서른을 넘어갈 무렵, 결국 오랑의 도지사는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한다. 도시의 출입구에는 삼엄한 경비가 서고,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막혔다. 잠시 도시를 떠난 이들은 돌아오지 못하며, 잠시 도시를 방문한 외부인 역시 돌아갈 수 없었다. 잠시 떠난 이에는 리외의 아내가 있겠고, 잠시 방문한 이에는 기이한 여행자 장 타루와 신문기자 랑베르가 있겠다. 오랑은 뭍에 있는 섬이 되었고, 그 안에 남겨진 사람들은 ‘이곳 사람’과 이방인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그리고 카뮈는 그들을 찬찬히 그려낸다.


‘자신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리외,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 것’을 듣고 기록하고 이해하려는 장 타루, ‘선의에서 나오는 용기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그랑은 보편적으로 생각했을 때 긍정적인 성품을 지닌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의사 리외는 매일 4~5시간 정도밖에 잠을 자지 못하면서 환자를 돌본다. 장 타루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삼 분의 일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원보건대를 조직한다. 시청 직원 그랑은 퇴근 후 시간을 쪼개 보건대의 통계 및 서류 작업을 맡아준다.


선량한 이들뿐 아니라 가치 충돌을 겪는 인물 또한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취재를 위해 오랑에 파견 온 신문기자 랑베르는 어떻게든 도시를 빠져나가 아내에게 돌아가려고 동분서주하나 좌절을 겪는다. 그리고 도시 탈출을 돕지 않는 리외에게 “선생님은 추상의 세계에 살고 계시잖아요”라 비난 섞인 어조로 말한다. 그러나 장 타루가 그에게 지나가는 말로 리외의 부인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묻자 깜짝 놀란다. 그리고 이튿날, 도시를 떠나기 전까지 보건대에 함께할 수 있겠냐고 부탁한다. 그토록 갈망하던 탈출 기회가 왔을 때에도 남겨진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결정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도시에서 이방인이니까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 내 경험에 비추어, 원하든 원치 않든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으니까요.”(p.244)


더 나아가, 카뮈는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하기 어렵고, 자칫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인물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길거리의 낯선 여인에게 키스를 퍼붓고는 자신이 페스트에 걸렸으니 축하해달라 말하는 남자, 가족이 페스트 진단을 받아 격리될 것을 두려워하여 의사를 적대시하는 환자의 가족들. 그리고 ‘코타르’라는 인물에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묘사했다. 코타르는 페스트 전, 범죄를 저지르고 후환이 두려워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이웃에 사는 그랑의 발견으로 살아났다. 페스트의 창궐로 행정력과 치안의 손길이 약해지자, 그는 묘하게 페스트를 기꺼워 하며 페스트와 공범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는 ‘혼자서 죄수가 되느니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포위되어 있는 편을 더 좋아’한 인물이다. 카뮈는 평가를 보류하고 코타르의 행동과 말을 묘사했다.




✔무신론적 성자


『페스트』를 발표하고 카뮈는 당대 언론으로부터 ‘무신론적 성자’라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생지옥으로 변한 오랑에서 페스트와 맞서 싸운 평범하고 성(聖)스러운 인간의 삶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신이 없어도 사람이 성자가 될 수 있는’지 탐구하던 장 타루는 카뮈의 자아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 생각된다.


장 타루는 과거의 한 사건을 계기로 어떤 형태로든지 ‘사람을 죽게 만드는 모든 것을, 또는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살인자도,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도, 페스트도, 페스트에 희생당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도 단호히 거부한다.


“나는 오랫동안 부끄러워했어요.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일이고 또 아무리 선의였다 해도, 나 또한 살인자였다는 것이 죽을 정도로 수치스러웠어요. ~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만 거죠. 나는 그 평화를 되찾으려고 지금도 여전히 애쓰고 있어요.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그 누구와도 철천지원수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거죠.” (p.294)


그래서 그는 세상을 관찰하고, 질문하고, 듣고, 기회를 주고, 기록한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고양이에게 침을 뱉는 일이 삶의 낙인 노인에게마저도 애정이 생긴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을 이해할 때까지 그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평소에 나는 세상의 ‘목소리’를 충실히 듣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갈등이 없어지리라 생각해왔기에 장 타루라는 인물에게 특히나 정이 갔다.



하나 놀라웠던 것은 무신앙자(용어는 1948년 『시사평론』에서 카뮈가 자신을 표현한 그대로 가져왔다)인 카뮈가 기독교 세계관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 속에서 파늘루 신부는 두 차례 강론을 설파한다. 첫 번째 강론은 발병 초기, 두려움과 반성이 시작된 도시에 파문을 던졌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불행 속에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당연히 불행을 겪어야 합니다.(p.115) 페스트가 죄악 된 도시에 내린 징벌이라는 강론이었다. (여섯 페이지에 걸친 강론의 내용을 한두 문장으로 짧게 요약하니 왜곡되어 전달될까 봐 걱정이다.)


리외는 이 강론을 듣고 파늘루 신부는 사람이 죽는 것을 충분히 많이 보지 못했기에 진리를 확신하고 말하는 것이라 평한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이 예언이라도 된 듯 “임종하는 사람의 숨소리를 들”은 후 파늘루 신부의 심경은 이전과 사뭇 달라진다. 두 번째 강론 말미에 파늘루 신부가 한 말이 깊이, 깊이 남는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남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오직,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며 선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어린아이의 죽음까지도 신의 뜻에 맡기고 받아들여야 하며, 개인의 힘에 의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p.265)


주어의 변화에 주목하라. 그는 이제 현실과 동떨어진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십자가가 상징하는 사지가 찢기는 고통을 충실하게 본받아 아이가 겪는 고통을 마주보며 벽 아래에 머물’렀다. 이것이 카뮈가 바라고 요구하던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파늘루 신부의 마지막 행보에서 기독교를 향한 카뮈의 존중을 읽을 수 있었다.




✔『페스트』가 2020년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침묵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페스트에 걸렸던 사람들에 대해 우호적으로 증언하기 위해,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 그리고 재앙 중에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만이라도 말하기 위해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결심했다. (p.360)


많은 비평가가 페스트는 나치를, 오랑시는 나치 점령 하의 파리를, 자원보건대는 레지스탕스를 은유한다고 해석했다. 페스트를 또 무엇과 치환할 수 있을까. 사회적인 살인과 개인적인 살인, 그리고 그것을 유도하는 모든 것들과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폭풍우 치는 바다 한가운데 놓인 난파선 마냥 혼란스러운 요즘이다. 바다가 언제 잠잠해질지는 알기 어렵다. 어떠한 정보도 없어 아무것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금방 절망에 익사할 것이다. 그러나 선원에게 항해일지가 있듯, 우리에게는 역사가 있고, 기록이 있다. 통찰력 있는 작가가 쓴 소설이 있다. 『페스트』는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형태의 페스트의 편에 서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라고 말이다.



결을 같이하는 토마스 딜런의 시 한 구절로 서평을 마무리한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순순히 그 어둠을 받아들이지 마시오

노년은 하루의 끝에 타오르고 악을 써야 하오

분노하고 또 분노하시오, 빛의 죽음에


                                                                                                               Apr. 25th,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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