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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rrr Mar 06. 2020

Prologue | 응 지금 내 침대 위

여행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가 물으면

꽃피는 춘삼월, 바야흐로 타의에 의한 전국민적 히키코모리 생활이 시작되었다.


평화와 번영, 발전만 가득한 (글자 모습도 뭔가 의미심장한) 2020일 줄로만 알았건만, 없는 년도로 치워버리고 싶었던 2019년보다 어째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결코 좋지만은 않다. 우한폐렴, 신종코로나, 코로나19까지 별명은 서너개인 내 동생도 아니고, 이건 뭐. 처음엔 짜증과 불안이 극도로 달해 스트레스가 극심했는데 이젠 화를 낼 기운도 없다. "역시 인간은 재밌어! 인생은 살고 봐야 해!"란 말만 (어떤 의미로든) 나온다.


근래 누구나 하는 이런 불평을 굳이 왜 또 늘어놓는가? 이 거창스러운 프롤로그를 적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코로나 덕분에 집에 가만히 앉아있자니 영 좀이 쑤시더란 말이지. 원래 차가운 도시에 잔뜩 찌든 30대 직장인이라면 모름지기 주말엔 내 침대에 콕박혀 안 씻고 아무도 안 만나고 최대한 아무것도 안 하지만 더욱더 격렬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훌륭한 직장인인 법이다.

하지만 청개구리 심보인지? 막상 평일에도 여유시간이 주어지니 아침에 눈이 말똥하게 떠지더라. 휴일에 대한 예의이자 마지막 자존심으로 몸을 일으키진 않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눈알만 굴렸다. 그때 온갖 잡동사니에 가려져 이젠 그만 죽여달라고 외치는 구형 노트북이 눈에 띄었다. '아, 저 울트라북... 살 때만 해도 역대급으로 진짜 얇고 가볍다고 기술혁신이니 뭐니 난리도 아니었는데.'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일 년이 채 안 됐을 때,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처럼 현찰박치기로(중요) 샀던 노트북이었다.

여전히 심플한 멋이 있지만 그램에 비하면 더이상 세련되지 못하고 은근슬쩍 한두군데 고장까지 나버린, 세월의 무상함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녀석이었다. 물건따라 주인인 나 역시...(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이젠 유튜브, 넷플릭스 등 영상보기용으로도 노트북은 안 쓰기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켰다. 켠 김에 남의 돈 벌기 바빠 오랫동안 방치해뒀던 블로그도 들어가 흑역사 탐방을 하며 이불킥, 침구청소도 겸사겸사했다.


2012년 제대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내 본격적인 도망질이 시작되었다. 아마 내 동년배들의 평균치보다 조금 더한 빈도로 참 여기저기 잘도 도망다닌 것 같다. 나는 딱히 역마살이 있는 사람이 아닌, 오히려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타고난 집순이다. 그러나 너무 진하고 날카로웠던 첫 직장이 안겨준 성장통은 집순이도 세상 밖으로 떠돌게 만들더라.

현실도피? 나 그거 대찬성!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신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그 이상의 고통도 주는 것 같으니(난 무신론자다. 무쏘의 뿔처럼 혼자 견뎌야 하는 게 인간 아니겠는가!) 우리에겐 이따금 도피처가 필요하다. 8282 한국인에게는 특히 더.


"아, 나 저때 왜 혼자 진지했니? 웃겨~. 그래도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로하네." 블로그의 사회초년생시절 글까지 읽다가 살짝 눈시울을 붉히...진 않고 나 스스로가 대견해졌다. 그때는 정말 우울증이었구나, 당시엔 깨닫지도 못했지만 용케 그 진흙탕을 잘 도망쳐 살아남았구나 싶었다. 그 당시 당장의 나를 위해 토해내듯 썼던 글이 지금 내게 몇 안 되는 값진 재산처럼 느껴졌다.


망해버린 해 2019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는데, 더 망하고 있는 것 같은 기운이 스믈스믈 올라온다. 자, 이럴 때는 또 도망쳐보자. 새로운 도피처는 브런치, 너로 정했다! 굳이 그전에 쓰던 블로그도 아니고 브런치냐 하면, 요즘 인싸도 아닌 마싸들은 다 브런치 한다면서요? 나 김라떼(3*세/대감댁 노비의 하청 노비)도 남들 하는 거 한번쯤 해보고 싶다 이 말이다.


어느 직장이든 모임이든 금방 실증내고 갑자기 쏙 떠나기를 잘하다가도 결국은 "집이 최고야!"를 외치는 유난히 내성적인 나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계속 글을 써보련다. 참, 꿀팁을 주자면 가끔은 미친 척하고 도망쳐봐야 집이 최고란 걸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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