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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 Aug 17. 2022

“넌 남편 잡아먹을 사주야!”

아, 이게 성차별 사주라는 거구나

오래간만의 여름휴가, 나는 10년 지기 친구와 1박 2일 경주 여행을 떠났다. 첨성대, 동궁과 월지 등 경주 주요 관광지들을 돌아본 뒤, 친구는 급한 업무로 하루 일찍 본가에 돌아갔다. 외롭게 남아버린 저녁 시간. 뭘 할까 고민하며 황리단길 근방을 거닐다 한 가게에 눈길이 멈췄다. '사주 집'. 무료 어플로 몇 번 사주를 보긴 했지만 정식으로 돈 내고 본 적은 없던 터였다. 그럼, 호기심이라 치고 한 번 미래를 점쳐볼까. 난 조심스레 구슬 블라인드를 걷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주 보려고?”


한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노련하게 사주 책을 꺼내 들었다. 이름과 생년 연일을 묻더니 뭔가를 척척  종이에 써 내려갔다. 그는 한자와 숫자를 한참 적은 뒤 내 눈을 노려봤다. 그리곤 경쾌하게 말했다.


"아주 약한 사주야, 약한 사주!"


그의 예상치 못한 첫마디에 저절로 '네?'하고 되물었다. 그는 속사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추운 가을에 태어난 나무 사주야. 어디 가서 말도 잘 못하지? 용기도 없고.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구먼. 아주 사주가 약해 빠졌어." 누군가가 내 표정을 보면 '똥 씹었다'라고 말했을 터. 순간 기가 차 입꼬리가 굳어 버렸다. 내유외강이란 칭찬을 듣던 내가, 저널리스트로 일하는 내가. 어디 가서 말을 못 한다고? 나름 강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순간 인생 전체가 시들시들해진 기분이었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이성 관련 사주는 더욱 황당했다. 추운 가을에 태어났으니 ‘불 사주의 남성’을 만나야 인생이 핀다는 게 골자였다. 그런데 남자 성격도 ‘불 같아야’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울컥! 하는 성질의 남자를 만나야 해. 그러다가 제 풀에 풀려서 ‘헤헤, 자기야’하고 다가오는.” 그의 말에 불현듯 전 남자 친구가 떠올랐다. 그도 감정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 욱 하는 일이 많았다. 그의 분노의 찬 고함소리를 들으며 매일 눈물을 쏟아냈던 2년 전 기억들. 난 결국 눈살을 찌푸리며 ‘정말 별론 데요’ 하곤 고개를 저었다. 그는 불만을 입 밖으로 잘 내지 않고, 쉽게 수긍하고, 웬만하면 받아들이는 나의 성격이 그런 남자와 잘 어울린다고 덧붙였다. 도대체 누구에게 좋은 연애죠,라고 따져 물으려던 걸 꾹 참았다.


아저씨는 다시 사주 풀이가 적힌 종이를 뜯어보더니, 뭔가 께름칙한 듯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쳤다. 그리곤 혀를 차며 말했다. “어휴, 남자도 잡아먹는 사주야!”


그가 얼마나 크게 말했던 지 옆에 앉은 다른 손님도 화들짝 놀라 쳐다봤다.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타는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아저씨는 개의치 않고 심드렁하게 풀이를 이어 나갔다. “남편 잡아먹는 살이 손님 사주에 무려 2개나 꼈어. 남편을 통제하고 군림하는 권위적인 아내 구만.” 그는 그래도 ‘남편 잡아먹는 살’들이 서로 만나 남편을 소생하게 하긴 하니 그리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했다. 이미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 나는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남자 잡아먹는 사주라고? 흉괘가 또 그런 흉괘가 없었다. 훗날 남자 친구 A에게 그 풀이를 들려주니 헛웃음을 쳤다. “그런 살이 낀 이유가 남편에게 명령하기 때문이라고? 그뿐이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A는 고개를 갸웃 이 곤 말했다. “그게… 남자를 잡아먹는 사주야?”


아저씨는 그렇게 20분가량의 ‘대대적인’ 흉괘 풀이를 끝낸 뒤 좋은 운이 들어오는 법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내용은 이러했다. 노출 있는 옷을 삼가고, 화려하게 입고, 얼굴을 잘 꾸미는 것. “내 말 대로만 해. 그럼 인생에서 크게 걱정할 일 없이 흘러갈 거야.” 나는 얼떨결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뭐에 감사한 줄도 모르면서. 그가 그날 내게 들려준 풀이 중에 그나마 도움됐던 내용은 ‘용기 내면서 살아’였다. 물론 약하다는 사주에 기반한 원색적인 응원이었다만.


인생 첫 사주 풀이.

비록 딱히 좋은 얘기는 듣진 못했지만, 알 수 없는 기시심을 일으켰다.

예전에 인터뷰했던 무당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주의 큰 뿌리는 바꾸기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나 본인이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때부터 변화는 시작될 거예요.”

그리고 풀이를 해 주는 사람도 사람이니 자기 가치관대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고. 나는 흘려 들을 수 있는 건 흘려 보내기로 결정했다. 맘에 어둔 얘기를 가둬봤자 나만 상처받을 게 뻔했다.  그리고 아무리 약한 사주고. 남자 잡아먹는 사주고. 불 같은 성격의 개차반을 만난다고 해도. 내가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 그렇게,  나 홀로 굳게 믿으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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