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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 Sep 25. 2022

남자 친구의 하루엔 내가 없다

취준생 남자 친구와 연애하는 건

그는 내 생일날 함께하지 못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난 어련히 같이 보낼 줄 알고 반차를 냈었다. 바보같이. 오롯이 혼자 보낼 줄 알았더라면 빌어먹을 일이나 더 할 걸. 대학교 4학년에 취준생인 나의 남자 친구 '숲'. 그의 24시간은 눈코 틀 새 없이 바빴다. 하루 이틀 텀으로 면접이 잡혔다. 내 생일 저녁에도 비대면 면접이 있었다. 


"오늘 2차 면접이라.. 시간 내기가 어렵네."  


그래, 내 생일보다야 취업이 먼저지. 나는 '알겠어, 나 혼자라도 잘 보낼게'라고 답장을 보냈다. 주위 친구들은 남자 친구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냐고 물어왔다. 어디 좋은 곳 놀러 갔냐고. 맛집을 갔냐고, 영화관을 갔냐고. 꽤 괜찮은 척하려고 노력했는데, 비참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의 탓을 한다기보단, 그냥 내가 너무 한심했다. 


 - 


숲은 사과가 빠른 편이다. 내가 서운함을 토로하면 곧장 '미안해'하며 사과한다. 평소 그를 아는 나는 그 말이 어찌 됐든 '진심'이란 건 안다. 말을 허투루 하는 편도 아니고, 과장해서 말하는 법도 없는 숲. 그 정도가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정이었다. 처음엔 그의 사과가 좋았다. 날 존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우리 관계가 위태하지만 녹진하게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부하느라 매번 늦는 연락 텀. 그의 시간에 맞춰 잠깐 짬 낸 통화에도 들려오는 타자 소리. 그리고 가장 나를 힘들 게 했던 건, 내가 없는 그의 하루. 매일 촘촘히 짜인 학교 수업과 학회 스터디, 지인 이력서 첨삭, 면접 공부 그리고 주말엔 심지어 학원까지. 그의 학교가 있는 신촌에서 내 회사까지 고작 20분. 숲은 그 실낱같은 시간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숲은 늘 '미안하다'고만했다. 내가 미안해, 내가 잘할게, 내가 더 신경 쓸게. 세 마디의 반복이었다. 제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면서, 나랑 만나려는 이유가 뭐냐는 볼멘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가 자꾸 내게서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자고 일어나면 거품처럼 사라질 사람 같았다. 그러나 참았다. 좋아하니까. 그 감정이 아직 불씨처럼 살아 있으니까. 그래서 참았다.


-


그러나 생일 다음 날, 난 결국 꾹꾹 눌러 왔던 감정을 터트렸다. "매일 내 하루를 챙겨줘서 고마웠어. 오늘까지만 연락하자, 우리."긴 시간 참고 참아 비로소 꺼낸 말이었데. 눈물이 계속 났다. 그간 서운했던 일들이 모두 잊힐 만큼 마음이 아팠다. 한 동안 답이 없던 숲은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동안 신경 못 써줘서 미안해. 네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줄 몰랐어. 난 너를 볼 때마다 너무 좋고, 앞으로도 좋은 관계로 계속 발전해 갔으면 좋겠어. 가을 면접 일정만 끝나면 돼.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될까.' 


어쩌면 숲은 내 생각보다 훨씬 이기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 기대보다 괜찮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숲의 손을 단호하게 놓으면, 난 지금보다 더 아파할 일이 줄어들 걸 알고 있다. 근데 또 바보같이 다시 손을 잡고 말았다. 가을 면접만 끝나면 된다고 하니까. 한 철만 더 참으면 된다니까. 반복되는 기대, 반복되는 실망. 난 또다시 기대를 택했다. 


 

엄마가 말했다. "미안해란 말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어." 엄마는 숲이 자신의 인연이 아니라고 느껴지면 과감 없이 놓아주라고 말했다. 엄마, 근데 걔는 취준생이잖아. 바빠서 잘 못 만나는 것뿐이지. 그녀가 말했다. "너네 아빤 취준생 시절에도 1시간 거리를 바래다줬어."



숲과 처음 만났던 지난 5월의 어느 밤. 누가 봐도 똑똑이처럼 꼼꼼히 정리된 머리와 차가운 표정으로 나타났던 숲. 또 나와 정 반대인 무척 차분하고 딱딱한 성격을 지녔던 그. 후, 나랑은 잘 안 맞겠네. 난 그날 1차만 하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참 대화하던 중 그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네 사진을 보고 멀지만 만나고 싶었어. 환히 웃는 모습이 괜찮은 사람 같았거든."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여움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부터 그의 매력이 차차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맞진 않지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같았다.


-


매일 아침 날아오는 카톡. 늘 한결같이 진중한 목소리. 정성스럽게 하루를 물어봐 주는 다정함. 꼬박꼬박 자기 전 수고했다고 말해주는 따스함. 

 

숲과 헤어지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숲을 잃으면 내 하루는 어떻게 될까. 조금 더 참을 걸 후회하진 않을까. 한 번 더 잡을 걸 미련이 남진 않을까. 아니면 늘 그래 왔듯 시간이 해결해줄까. 숲은 오늘도 나와 만나지 못했다. 내일 오전에 대표 미팅이 있다고 했다. 나는 평소처럼 '잘 보고 와'하고 응원했다. 내 옆 자리는 또다시 공허만 남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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