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연인을 기억하는 방법
"잘 지내? 생일 축하해!"
생일날 전 남친이 연락 오는 것만큼 인생 중 큰 이슈가 있을까. 차라리 새벽에 메시지를 보냈다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오후 1시 벌건 대낮에 보냈다. 나는 일단 숨 한 번 돌리고 메시지를 캡처했다. 그리고 내 친구들 단톡방과 현 남자 친구 '숲'에게 보냈다. "전 남자 친구가 생일 축하한대!" 나름 내게 벌어진 이 재미난 일을 공유하고자 했던 건데 숲에게 보낸 건 실수였다. 숲은 곧장 "이걸 왜 나한테 말해?"라며 화냈으니 말이다.
전 남자 친구 'BS(bastard의 약자다)'에게 답장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메시지를 무시하면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난 "응, 고마워!"라고 답장했고, BS는 다시 "요새 어떻게 지내? 궁금하다."라며 답장했다. 나는 그의 뻔뻔함에 감탄사를 질렀다. 우리가 어떻게 쫑 났는지 기억이 안 나?
그 후로도 BS는 프사가 예쁘다는 둥 요새도 마라탕을 먹냐는 둥 종종 메시지를 보내왔다. 다시 잘해보려는 심산인 지 아님 정말 안부 겸 보낸 건 진 알 수 없었다. 옛날의 나였다면 분명 '심한 말'과 함께 그의 프로필을 차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20대 중후반이 된 지금은 애처럼 굴기 싫었다. 나는 BS에게 "나 새로운 남자 친구 생겼어. 아마 그 애가 너한테 연락 온 걸 알면 안 좋아할 거야. 잘 지내길 바랄게."라고 답장을 보냈다. BS는 그 후로 답을 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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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연인과 지인으로 지낼 수 있어? 란 질문. 예전의 나였다면 무조건 'NO'였다. 일단 내 연애는 대부분 끝이 안 좋았다. 카톡 친구란에 남겨 놓기라도 하면 양반이다. 난 전화부터 카톡, SNS까지 모두 차단을 하는 편이었다. 20살 땐 전 남자 친구가 내 손에 쥐여주고 간 편지를 기숙사 주차장에서 동기들과 화형식을 치루기도 했다.
그런 행동들의 바탕에는 '날 이젠 사랑하지 않는 모습'에 대한 배신감이 자리해 있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를 외치던 영화 주인공이 바로 나다. 그들을 차단하는 이유도 동일했다. 그들이 다시 새로운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싫었다. 남은 감정이 있어선 아녔다. 그냥 한 사람의 변화를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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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작년 10월, 내가 지나가버린 인연을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몇 년 전 사귀었던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의 웨딩 사진. 그땐 마냥 철없는 대학생이었는데 그도 어느새 어엿한 가장이 됐다. '잘 어울리네. 두 사람.' 직장에서 만난 사이구나. 나는 무의식적으로 웨딩 사진들을 쭉 둘러봤다.
그와도 좋게 끝난 건 아니었다. 울고 불고. 죽어라 싸웠다. 그러나 몇 년이나 지난 지금은 양복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냥 '잘 지내는구나'란 안도감. 한 때 가장 친밀했던 사람의 새 시작을 기뻐하는 마음. 산들산들, 기분이 가벼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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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 연인과 지인으로 지낼 수 있어? 란 질문을 받는다면. 사실 그 질문의 의도는 그 사람과의 모든 과거를 덮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 지내란 말은 아녔을 테다. 그 사람과 친구로 다시 만나도, 그날의 추억과 순간의 감정이 떠오를 텐데 어떻게 덤덤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요즘은 그 질문이 조금씩 이해가 된다. 나이가 들면 들 수록,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점차 잦아들었다. 되려 떠나간 인연을 아쉬워하는 일이 많아졌다. 애인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성숙하게 연애하고 성숙하게 이별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요즘. 지나가 버린 인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그 인연을 다시 사람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가. 그 고민을 하다 보면, 전 애인을 지인으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한껏 정리되고 차분해진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와 연으로 만나 터 놓고 사랑했으면 된 거다. 만일 헤어졌다면 한껏 미워하되 영원히 감정을 가져가지 말자. 정말 안 좋은 일로 헤어진 게 아니라면, 그저 나처럼 짧은 인생을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기억에 묻어주자. 그리고 헤어질 연인에게 쓸 감정 대신, 현재의 연인에게 최선을 다하기.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