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금 Aug 20. 2023

스님이 말했다,
평생의 연을 놓쳤다고

일전에 묘한 일이 있었다. 혼자 강원도 정선으로 트래킹을 하러 아침 기차를 탔던 날이었다. 옆자리에는 겨울용 승려복과 신발을 신은 여승이 앉아 계셨다. 매미 울던 7월 초였는데 말이다. 전날 잠을 설쳤던 나는 3시간 내리 푹 자려던 차였다. 기차가 출발하고 3분 가량 흘렀나. 여승께서 내 팔뚝을 두 어번 투욱 툭 치더니 말을 거셨다. "아가씨는 무슨 일로 정선에 가요?"


검푸른 산 아래 작은 절에서 산다는 혜연 스님. 반 년만의 출타라고 했다. 너무 오랜만에 세속에 나와보니 계절이 바뀐 지도 몰랐단다. 나는 무거운 눈을 비벼가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질문 두 어개로 끝나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평소 새벽 2시에 기상한다는 혜연 스님에게 오전 7시는 쌩쌩한 오후와 다름없었다. 


"내가 사주 한 번 봐줄까요? 내가 점 치는데는 도사인데." 그나마 귀가 틔이는 소재였다. 내가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알려주자 혜연 스님은 이리저리 손가락을 굴리면서 점을 쳤다.  나의 청년과 말년 시절의 운, 귀인을 만날 시기, 가까이 해야 하는 컬러...대화는 자연스레 연인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아가씨는 지금부터 만나서 28살에 결혼을 해야 해. 남자는 아가씨랑 같은 나무 사주나 물 사주가 좋아." 혜연 스님은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갔다. 자식 복은 많아서 세 명을 낳는다. 아이는 오후 2시 정각에 낳아야 부족한 불 사주가 보완된다. 남편이 돈을 잘 버는데 내 씀씀이가 커서 솔솔 샌다 등. 어디서 한 번쯤 들어 본 내용이긴 했지만, 처음 듣는 척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혜연 스님의 눈빛이 불쑥 측은하게 바뀐 건 사주 풀이를 한 1시간 30분가량 했을 때였다. 나는 거의 반사체가 되서 귀만 열고 있었다. "아가씨, 대학생 때 그 오빠 왜 놓쳤어요? 평생의 연이 될 수 있었는데." 나는 토끼눈이 되서 스님을 쳐다봤다. 누구? 경영학과 그 오빠? "에이, 그럴 리 없어요. 스님. 평생의 연이 되기엔 이름도 기억이 안나는데요." 스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아녜요, 그 사람이었어요. 지금은 너무 오래 만나지 않아 연이 다 했지만." 


내 인생 첫 남자친구 'B'. 우린 2016년 같은 대학 기숙사 동아리에서 눈이 맞았다. 나랑은 6살 차였다. 그나마 기억나는 그의 잔상은 키는 조금 작았고, 피부는 까무잡잡했다는 것이다. 동아리 일을 핑계삼아 한 달 동안 코치코치 전화를 걸며 친해졌고, 그후 사귀잔 말도 내가 먼저 꺼냈다.


B는 스무살이었던 내게 조심스러웠다. "나는 널 지켜줘야 해. 난 네 남자친구니까." 난 그때 그가 매우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손 잡는 것 외에 다른 스킨십은 조심조심 늘 허락을 구했다. 포옹은 많이 했다. B는 커다란 강아지 인형같았다. 늘 품이 노곤하게 따뜻했다.


우린 비가 엄청 쏟아지는 내리는 새벽에 비를 맞으며 첫 키스를 했다. 과감하게 학교 기숙사 캠퍼스 뒷편에서 말이다. 야매로 만든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나름 낭만적인 키스를 했음에도 기억에 남지 않는 건, 연애경험이 전무한 둘 다 그리 잘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련지.


B는 매사 진심이었다. 하루는 빼빼로 데이였다. 저녁 8시 쯤, 기숙사 정문에서 잠깐 만나자는 말에 모자를 챙겨쓰고 나갔다. 안색이 조금 지쳐보이던 그는 불쑥 하얀 쇼핑백을 건넸다. 가방 안에는 서로 다른 맛의 빼빼로 12곽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옆 동네 편의점까지 다녀왔어" 그가 왼쪽 발을 바닥에 튕기며 쑥쓰러운 듯 말했다. 사근사근한 가을 바람이 와락 불어왔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가장 로맨스스런 모습이었다.


와락 화내는 법 없이 매사 동글했던 성격. 대학 후문 허름한 식당에서 막걸리 기울이기를 좋아하고. 고민할 때마다 쏙 내놓는 혀 끝. B를 좋아했던 이유를 지금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각조각 떠오르는 추억들을 끼워 맞춰보면, 그냥 B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했었다. 나와 참 닮아 있었던 그 순수함이, 진실함이.


"그래서, 그 사람하곤 왜 헤어졌어요?" 혜연 스님이 뭉실뭉실한 추억들을 불쑥 뚫고 질문했다. 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이별 사건 요약을 해보자면, 내가 먼저 그에게 질려 헤어지자고 말했고, 그는 내가 바람핀다고 의심해 행실을 지적하는 편지를 줬으며, 나는 기숙사 지하 주차장에서 그의 편지를 친구들과 함께 불로 태웠다...세속 사람이 평생의 연에게 저지른 지난 악행을 차마 고백하진 못했다.


혜연스님보다 내가 먼저 기차에서 내렸다. 스님은 내게 자신의 번호를 알려줬고, 나는 고마움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스님이 짐을 챙기던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근데 사실 평생의 연도 별 거 없어요. 남들처럼 사랑하고 싸우는 건 다 똑같으니까."


누구나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걸 꿈꾼다. 그런데 난 이미 평생의 연을 7년 전 떠나 보낸 입장으로서 이젠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평생의 연인 것 처럼 사랑하면 될 일이니 말이다.  


입추가 막 지났나보다. 얼굴에 불어오는 여름 바람이 조금 선선해졌다.                                                   

작가의 이전글 성우학원을 다니게 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