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약사다.
약국의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겠다고 MBA를 해놓고선, 정작 공공기관에 입사해 신약등재를 메인으로 다양한 업무를 확장해 왔다. 신약등재, 급여기준설정, 약가산정, 약제급여목록 개정, 약제비 모니터링, 의약품 유통 모니터링 시스템 개발, DUR 점검코드 개발, 그리고 바레인 의약품 관리시스템 수출 프로젝트까지. 대부분의 약사들과 다른 길을 걸어왔고, 공공기관 내부에서도 다양하고 굵직한 사업들을 해본 특이한 케이스다.
얼마 전, 심사평가원에서 함께 일했던 변호사 A 씨가 제약사 중역이 쓴 에세이 한 권을 보내왔다.
감사의 뜻을 전할 겸 근황도 알릴 겸 식사를 했다. 신약등재 업무를 중심으로 컨설팅 사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심사평가원 시절 화제였던 바레인 사업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Bahrain 사업을 했던 경험이 지금 당신에게 도움이 되나요?
나는 현문우답을 했다.
저는 지금 어느 나라든 의약품관리시스템을 설계해달라고 한다면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어요.
그녀는 다시 질문했다.
그런 시스템이 필요한 나라들이 있을까요?
나는 설레어서 말했다.
AI 고도화 시대에 인공지능을 사용하기 위한 인프라를 구축할 수밖에 없어요.
이 시대가 흘러가는 방향성이죠. 제가 했던 프로젝트와 유사하거나 버금가는 일들이 차곡차곡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일에 전문가이며 이 일을 성공시켰던 사람입니다. 누군가는 벌써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국가의 의약품관리시스템을 설계한다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까지 한순간에 역량이 쌓였던 것도 아니다. 그동안 축적해 왔던 다양한 업무들이 응집되어 있었고 그 프로젝트에서 발산된 것이었다. 스티븐 잡스가 "Conneting the dots"라고 했던 것처럼 난 그 힘을 믿고 있다.
당시 실무자들 사이에선 그 계약건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대표적인 이유는 공조직에서의 선례가 없기 때문이란다. 의약품 설계 담당자인 나는 설계가 가능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아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결국 심사평가원 최초로 국제 수출 계약을 따냈고 그것은 여전히 심사평가원의 자랑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사후관리하는 부장님을 만났을 때 바레인의 의약품관리시스템이 어떤지 물어보았다. 의약품관리시스템만큼은 잘 돌아간다고 했다. 그때의 복잡미묘한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사업을 통해 얻은 중요한 것이 있다.
가시적인 것을 얻은 건 없지만, 내 평생 가져갈 자존감을 얻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을 해냈을 때, 나는 또 해내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자기 평가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의 오늘을 신뢰하는 자산이 되고, 용기를 갖고 도전할 수 있는 원천이 된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업무 또는 남이 기피하는 업무를 맡은 직장인들에게 그 일에 몰입해보기를 권한다. 그곳에서 당신은 통찰력을 키우고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도 있다. 또는 당신의 역량 통장에 잘 예치되어 있다가 필요한 때에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