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중심이 어디에 있나요?
서늘해지면 더 깊어지는 수족냉증 때문에 겨울에는 항상 양말을 두 개씩 신고 핫팩을 늘 끼고 살아요. 어느 날 반쯤 잠들어 있던 다니엘의 뜨근한 몸에 차가운 손을 대고 찰싹찰싹 녹이려 했더니, 그가 정색하며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차가워?" 하며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 순간 저는 기분이 확 상했습니다. "다니엘은 나를 사랑하지 않나 봐” “로맨틱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라는 등의 생각에 휩싸여 기분이 상해서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등의 말을 퍼붓고 등을 지고 누워서 한참 토라져 있다가 잠들었어요.
제가 기분이 상한 이유가 다니엘이 저에게 “차가워!” 하지 마”라고 말해서 일까요? 다니엘의 말이나 행동은 제가 느낀 감정의 계기가 될 뿐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고요?
만약 제가 조카 주이를 만졌는데 주이가 “이모, 차가워하지 마” 했다면 그냥 미안해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거예요. 하지만 다니엘이 건넨 같은 문장은 왜 저를 기분 상하게 했을까요?
그건 바로 제가 가진 사랑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대와 환상 때문입니다.
무의식적 기대와 신념:
”자고로 좋은 파트너는 내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해줘야 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날 걱정해야지”
이런 문장들이 제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신념이라기보다는 무의식에 있어서 기분이 상할 당시 잘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이었어요.
그저 “다니엘은 날 신경 쓰지도 않아” “저 사람 차가운 사람이네, 미국 사람들은 원래 그런가?” 등의 아무 말 대잔치 흑백논리를 머릿속으로 펼치며 (그 당시에는 정말 합당하다고 여겼던) 다니엘의 이야기를 들어보거나 이해할 생각조차 못했어요.
찬 손을 댄 건 저지만 그 생각들 안에서 저는 분명 피해자였거든요.
다음날 아침 오랜 대화를 나누다가 무의식 속의 기대와 스토리를 알아차리고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사실 어제 기분이 상한 것은 당신이 찬 손을 거부한 것이 로맨틱하지 않은 행위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녹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서야.”
다니엘은 “그렇구나,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공유해 줘서 고마워. 사실 나는 어제 잘 이해가 되지 않았었어. 차가운 손을 거부하는 것과 로맨틱함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거든. [다니엘은 K드라마를 많이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습니다 ]
그 대화가 있고 나서 우리는 차가운 손을 “로맨틱한 손 [romantic hands]”이라고 부르며 장난을 치는 우리만의 언어가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우리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이와 같은 무의식적인 규칙과 기대치를 갖고 살아가는데, 이를 '매뉴얼'라고 부를게요. "매뉴얼"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개인에게 정상적이고 수용 가능한 행동에 대한 규칙과 기대치를 담은 것과 같아요.
“집청소를 더 많이 도와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생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남자가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 "토요일에는 꼭 데이트를 해야지" “일을 덜 하고 가정에 시간을 더 써야 한다” ”음식을 더 건강하게 먹어야 한다” “가족은 밥을 같이 먹어야 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다른 여자들을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해야 한다” ”사랑한다면 이해해야 한다” 등등
이러한 매뉴얼은 “내 기준에서”(또는 내 세대나 문화권, 내 가족과 주변인 사이에서) 당연한 것들이고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깔려있어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종종 관계는 [특히 커플] 두 사람이 서로의 매뉴얼을 따르며 서로를 희생하는 방향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고 이 것이 아주 아름답고 로맨틱하게 포장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무조건 매뉴얼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연결이 아닌, 우리에게 희생만 강조하고 통제하는 억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방법은 커플 카운슬링에서도 자주 사용되는데, 상대가 충족시켜야 할 '기대와 욕구'를 나열하고 그걸 맞춰줘야 한다는 방식이에요.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성공한다면, 관계는 규칙과 의무의 나열, 즉 본질적으로 그런 것들을 지켜야만 한다는 된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무의식적인 기대는 종착점이 있는 게 아니고 계속 변화되기도 하고 방대한 양의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다니엘과 저는 서로의 기대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채워주지는 않기로 결정했어요. 이로써 관계가 한층 가벼워짐과 동시에 각자 스스로를 깊게 살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에게 부탁이나 요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전보다 대화도 더 많아졌고 서로에 대해 더 많이 궁금해하고 서로의 무의식을 탐험하고 있습니다.
그저 우리의 무한한 욕구나 기대가 충족될 수 있도록 상대방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채워야 한다는 부담 없이, 서로의 공간에서 편안하게 지내려 하고 있어요. (늘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미세한 규칙과 의무의 나열이 관계를 따라잡기 시작하면, 그곳에서 벗어나기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성숙한 관계에서는 서로의 니즈와 기대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이것들이 무거운 짐으로 전환되어 관계를 가두는 것을 조심해야 해요. 그렇기 위해 이 두 가지만 기억하세요!
"내 안의 촘촘한 매뉴얼을 유연한 가이드가 되도록 하는 것"
"피해자가 아닌 내 감정의 주체자가 되는 것"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어떤 매뉴얼이 가장 자주 발현되나요? 그 신념이 나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서 지각 능력이 뛰어나다는 신호는 "당신이 나를 기분 나쁘게 했어"에서 "내가 이런 감정을 느꼈어"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은 우리의 해석에 의해 형성됩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면 다른 사람이 우리 감정에 대한 권력을 갖게 됩니다. 책임을 지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실어줍니다.
- ADAM GR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