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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뚜 Apr 21. 2022

효도와 신념 사이

치매 엄마와 사는 이야기

건조기의 먼지통을 닦아내다가 얼마 전 검진받으러 가기 전이 생각났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깨어나지 못한다면 딸들에게 영영 하지 못할 거 같아 큰딸 S에게 간단히 톡을 보냈던 게 생각나서였다. 그때 나는 진지했다.

결혼생활 중이었다면 지나가는 불안이라고 치웠을 거였다. 혼자인 나는 아이들의 거취가 걱정이 되었고 무엇보다 딸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꿋꿋하게 잘 살기를 바랐다.


'딸 엄마가 사랑해'


'엄마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내 마음을 어떻게든 알려주고 싶었다. 한창 S에게 못마땅해하는 티를 팍팍 내고 있던 터라 더 필요했다.

학교에 있던 녀석은 폰 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건강 검진하러 가는 걸 알았던 S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회복실에 누워있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어디야? 검진 어떻게 됐어?"


답할 새도 없이 속사포로 쏟아내는 말에서 걱정이 느껴졌다. 평소 뭐라고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응 어쩔 티브이 저쩔냉장고" 받아치는 S라서 엄마를 걱정하는 면모를 보이리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였다.


"결과 나오려면 한참 멀었어"



S는 곧이어 친구랑 교복 치마를 줄이러 가도 되냐고 묻고는 끊었다. 엄마 안부가 본론인지, 교복 치마가 본론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S가 나의 카톡을 보고 전화하기까지 불안을 느꼈을 거 같아 한편으로 미안했다. 내 속에 누구가에게 걱정받고 싶었던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던 건지 돌아봤다. 아~~~ 주 아~~~ 주 조금은 있었던 것 같았다. 이런 한심한. 이제 16살밖에 안된 딸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갖다니. 순간 두렵기도 했다. 내가 어느 순간 영희 씨처럼 딸에게 많이 의지하게 될까 봐. 그래서 S가 나로 인해 힘들어할까 봐.


영희 씨에게 가장 싫었던 건 옆에 있으면 언제나 보호자 노릇을 해야 하는 거였다. 그 보호자 노릇이란 건 중학교 때부터가 본격적이었던 것 같다. 글을 전혀 모르는 문맹. 엄마는 국민학교를 다니다 6.25. 전쟁으로 못 배웠다고 했다. 해방 전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일제 치하에서 보내다 늦은 시기에 학교를 들어갔으나 6.25가 발발한 거였을까. 학창 시절 친구들 가정 조사서의 부모 학력란을 슬쩍 보면 국민학교 중퇴, 국졸이 꽤 있었다. 국민학교 중퇴여도 영희 씨와는 다르게 친구 엄마는 글을 더듬더듬 읽었다. 글자를 천천히라도 아는 것과 전혀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엄마는 내 공부 관련해 서운할 정도로 나에게 가타부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학교생활에 관해 먼저 묻는 게 없어 상 받거나 시험 잘 본 걸 얘기하면 부엌일에 눈을 고정시키곤 "어린아이. 그랬구먼. 잘했네"그게 다였다. 내가 인정 욕구가 많은 것도 그때 받지 못해서일지도. 못 배운 한을 자식을 통해 풀려는 부모의 잘못된 욕망을 그린 드라마를 보면서 과보호라도 그런 관심을 받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생존에 급급해 살기만 했던 영희 씨 인생에서 그런 건 기대할 수 없는 거였다.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것 외에 내가 바라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부모. 그렇지만 내 보호가 필요한 부모. 영희 씨에 대한 나의 기억은 그 문구들로 정리된다. 병원에서, 마을에서, 정류장 등지로 같이 나가는 순간 내가 앞장서서 모든 걸 알아내야 하고 다시 알려줘야 했다. 그런 시스템은 나를 질리게 했다. 언젠가부터 영희 씨와의 동반 외출이 부끄럽고 짜증스러웠다. 더군다나 구두쇠 아버지, 그런 아버지 눈을 피해 쌀을 내다 팔아 엄마가 생활비를 마련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은근한 무시의 시선이 제일 싫었다.

나의 내성적인 성향은 그렇게 형성이 된 듯하다.


성인이 되어서는 시도 때도 없는 영희 씨의 눈물이 싫었다. 누가 당신에게 조금만 온정 어린 말이라도 건네면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사회의 냉혹함을 안다면 남 앞에서 울지 않는 게 국 룰이다. 얼마나 이용해먹기 딱 좋은 모습인가. 조금만 생각해주는 듯한 말을 하면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속내를 다 드러내는 것이.

그런 일을 내 눈앞에서 보는 날이면 어김없이 영희 씨에게 짜증을 냈다. 영희 씨의 일자무식, 약한 심리는 내 인생 내내 창피함의 원흉이었다. 조금씩 희석되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


누군가의 보호자로 사는 건 힘든 일이다. 다만 그게 자식일 때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보호가 지극히 당연하다는 점, 자식의 존재 자체로 일정 부분 상계가 된다. 부모 돌봄으로 넘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살아계신 부모님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돌보는 데 있어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있다. 피와 살을 준 부모니까 당연히 직접 돌봐야 한다는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다.


나는 성장하면서 엄마의 사랑을 가슴에 와닿도록 느껴본 기억이 없다. 영희 씨와 나눌 행복한 추억이 그리 있지도 않다. 되려 어릴 적 부터 해야했던 보호자 노릇이 환장하도록 싫었는데...... 나는 왜 엄마와 5년째 같이 살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나는 우리 엄마를 요양원에 모시고 싶지 않다는 그 신념 때문에 엄마와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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