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첫째 S가 이불을 들고 들어왔다. S는 원래 제 방에, B와 나는 안방에서 잔다. 영희 씨는 건넌방을 쓰시고.
자정이 다되어 시작한 친구들과의 게임이 그제야 끝난 모양이었다. 졸린 눈을 겨우 떠 몇 시인지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와중에 짜증이 밀려왔다. B와 같이 쓰던 방을 혼자 쓰고 싶다 해서 S에게 넘겨주고 S가 혼자 자기 시작한 지 벌써 몇 개월. 요새 방학이라 유튜브, 티브이 삼매경에 빠지더니 무섭다며 잘 때 되면 이리로 건너왔다. 밤 12시는 넘기지 말라고 그리 부탁했건만. 자는 문제 때문에 속을 많이도 썩었었는데 좀 나아지나 싶더니 방학이라고 다시 이러고 있다. 아이들 좀 더 어렸을 때는 늘 둘 사이에 끼어서 잤었다. 그러다 S의 팔에 맞아 자다가 아닌 밤중에, 그야말로 진짜 번쩍! 스타를 본 이후로는 둘 사이에 자는 게 조심스러웠었다.
요새 S의 난입으로 발밑에서 자다 보니 아이들이 풀썩거리는 이불 먼지를 고대로 들이마시면서 자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목이 칼칼하다. 밤새 서걱거리는 이불 소리도 다 들려서 역시 숙면 못하기는 마찬가지. 안 그래도 연일 잠시간이 모자란데 게임하며 대화하는 소리가 하도 커서 자다 깨다를 반복 하다 잠든 차였다.
늦게 들어와 부르니 짜증이 솟구쳤다.
"너는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어쩌고 저쩌고)~~"
"미안해."
"어후 진짜 왜 그러냐! 몇 번을 말하냐! 엄마가 잠을 못 잔다고 저번에도 (어쩌고 저쩌고)"
"미안해................................."
화장실 다녀와서도 계속되는 나의 한숨 섞인 짜증을 듣던 S는 "아우 짜증 나! 내 방 가서 잘 거야!"
이러고는 제 이불을 들고나가면서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
순간 너무 했나 싶었다. S가 나가버리니 나의 짜증은 많이 가라앉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후회도 되었다."그래 자라. 다음엔 일찍 자라"가 한마디만 해도 되었을 것을.
육아스타일은 엄마로부터 그대로 전수받는단다. 이걸 고치기 위해선 뼈를 깎는 고통만큼을 감내해야 한다고. 육아서에 그리 기록돼있던걸 아직 기억한다. 그 문구를 보면서 속으로 '망했다..'싶었다. 난 엄마와 대화를 많이 하며 자라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 욕심이 넘쳐나던 나는 내 몸안에 고스란히 잠재되어있을 내 어머니의 육아방식을 깨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었다. 아이(I) 메시지 대화법, 공감해주고 지지하는 대화법을 아이 어릴 적 수강하며 모임을 가졌고 급기야 공동육아에 발을 들이기까지. 그런 노력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어 첫 자식 S가 5살 될 때까지 거의 화를 안 내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둘째 B가 태어나고부터였다. 몸이 너무 힘드니 내가 쉴 시간 확보가 시급했고 그러려면 갓난쟁이를 빨리, 그리고 많이 재워야 했다. 둘을 같이 데리고 자려니 갓난쟁이의 잠을 방해하는 S의 행동에 자꾸 제지를 가하게 되고 당연히 거기에 따르지 않는 어린 S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재돼있던 모계 육아방식이 서서히 날개를 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영희 씨는 사소한 것으로도 자주 짜증을 냈다. 그리고 푸념을 했다. 어쩌다 말을 안 듣고 속이라도 썩이면 "저런 것을 낳고 (내가) 미역국을 먹었다"며 눈물을 짓기도 했다. 나는 억울했다. 말 한번 안 들었다고 출생까지 들먹이는 것에 대해.
하지만 엄마에게 맞은 기억은 없다. 빨간 고무대야 안에서 목욕할 때 피부가 벗겨지도록 비벼대는 때수건이 아파서 "아야야야" 몸을 비틀면 가만히 있으라고 등짝을 한번 맞았을 뿐. 영희 씨는 짜증을 내면서도 내가 해달라는 건 다 해주었다. 짜증 내려면 해주지 말고, 해주려면 짜증을 내지 말던가 해야지 원. 어린 내가 느끼기에 과하다 싶었다.
살면서 엄마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던 나의 마음 기저에는 어린 나이에 받았던 짜증의 억울함도 일정 부분 있지 않을까 조심히 짐작해본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는데 아이들에게 똑같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어느 날, 영희 씨가 생각났다. 늙고 병든 남편과 살면서도 인정은커녕 전처 자식들에게 홀대와 무시를 받았던 영희 씨는 눈뜨면 일해야 하는 산촌에 살면서 체력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많이 힘에 부쳤을 것이다. 생활비가 모자라 장날이 되면 쌀을 이고 나가 팔아서 자식이 좋아하는 초코파이 하나, 생선 두어 마리를 사던 여자에게 무슨 낙이 있었을까.
직업이 있는 나조차 가장의 현실 앞에 무섭기도, 불안하기도 해서 아이들에게 그 감정을 전가시키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쉽지는 않다.
오랫동안 영희 씨를 답답해했다. 세상일을 잘 모르고, 알려주면 또 아니라고 우기기도 잘해서 욱하는 마음이 올라온 적이 많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자식 여럿 딸린, 글 자모르는 여자가 살았던 그 세상은 내 예상보다 더 무섭고 혹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희 씨가 택해야 했던 삶의 방식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 까라고 이해의 회로를 돌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