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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케이 Sep 29. 2024

걸어야 끝나는 하루

하염없이 걸어야만 하는 날이 있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실타래처럼 꼬여 그 끄트머리를 발가락에 묶고 죽죽 풀어내듯 걸어야 하는 그런 날.


지금 내가 사는 엘에이 이곳은 

사람의 것인지 개의 것인지 모를 배뇨와 화가 난 노숙자들의 시선을 피해 다녀야 하는 도시지만,

나는 여기서도 햇빛이 완전히 가시기 전이라면 한두 블록이라도 굳이 걷고 들어오는 날이 많다.


그렇게 걷는 동안에 이름값을 하듯 꼿꼿이 고개를 든 주황색 능소화나, 제 몸만 한 가방을 메고 엄마 손을 쥔 초등학생 아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같은 것을 보다 보면 어느새 내 발에 달린 생각들은 잊고 지나치는 생명들에 집중하게 된다.


얼마 전에는 그 생명들 중 하나가 나를 불러 세우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은 한 흑인 노인이었는데, 그는 본인 이름이 적힌 PVC 소재의 팔찌를 보여주며 앰뷸런스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첫마디가, 건강 보험이 있으시냐는 거였다. 의료비가 말도 안 되게 비싸기로 유명한 미국에서 성급히 앰뷸런스를 불렀다가는 한 번에 200만원이 넘게 나간다. 

그가 괜찮다고, 전에도 이용한 적이 있다고 대답하고서야 어디가 불편하시냐는 말이 나왔다.

다리가 불편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시선을 내리자 과연 한쪽 다리가 퉁퉁 부은 채로 더러운 붕대에 대충 감겨있었다. 바지는 너무 오래돼서 헌 건지,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다.

노숙자로 보이는 그가 병원에 호송되더라도 본인이 비용 부담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세우고 나는 911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 응급구조요원이 언제, 어떻게 다리를 다친 것 같냐고 물었다.

질문을 전달하자 그가 대답하길, 십 년도 더 전에 총상을 입었다고 했다.

아마 그 후로 계속 상처가 덧나고 곪은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의 말을 전화기에 대고 반복했다. 곧이어 통화가 끝나고 그에게 앰뷸런스가 도착하기까지 같이 있어주면 좋겠냐고 묻자 그는 미소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원래 목적지였던 길 건너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사고 나오자 그 새 도착한 앰뷸런스에서 구조요원들이 내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오며 생각했다.

'결국 병원에 갈 수 있었을까?'

'전에는 누구한테 부탁해서 병원에 갔을까?'

'나 이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무시했을까?'

'나는 무슨 생각으로 보험 있으시냐는 말을 제일 먼저 한 걸까?'

'내가 아무리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도 그와 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부모님 돈으로 책 좀 읽었다고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거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한 발상인가?'


내가 그냥 '아, 단 거 먹고 싶다' 생각할 정도로 꿀꿀할 뿐이었던 기분을 끌고 걷던 거리를 

그는 젊었을 적 총에 맞아 아픈 다리를 끌고 걸었다. 나아가 그 거리에 살았다.

그런 우리가 마주쳤으니 나는 왠지 바보가 된 기분을 하고 더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총상에 버금가는 아픔을 안고 집 삼았을 거리가 새삼 낯설고 무서워서 오래 걷지는 못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남은 걸음을 채우는 기분으로 이 글을 적는다.

꼭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무엇을 얻으라는 말을 하고 싶은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냥 밖에 나가 걷다보면 내가 일인칭으로 사는 삶이 실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덜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그것이 때로는 위로가 되기도, 기쁨이 되기도, 이 경우에는 부끄러움이 되기도 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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