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k Feb 13. 2021

몸만들기

꾸미는 것이 아니라 가꾸는 의식

어느 해 보다 비와 눈이 많았던 2020년이었다. 여름에는 기나긴 장마에 겨울에는 한파뿐 아니라 자주 쏟아진 폭설에 우리는 집에서 움츠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본격적으로 내 몸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꾸준히 몸을 가꾸기(돌보기) 시작했다. 눈이 쏟아지는 날에도 그 눈을 풍경삼아 차분이 내 몸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다. 몸을 가꾼다. 그러면 '날씬하겠네', '건강하겠네' 쉽게 이런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내가 투자한 시간은 그런 몸만들기가 아니다. 꾸미듯 외형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몸을 가꾼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몸이 '어디가 불편한지', '어떻게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지',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내 몸을 알아차리고  대화하는 경험이다. 가꾼다는 말도 사람들은 꾸민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기에 누군가가 '요즘, 뭐해'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멈찟할때가 잦다.


시작은 차분하고 고요한 공간에 눕는다. 편안하게 누워서 시작한다고 하지만 싫은 편안하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편안하게 눕기'이지 않을까. 그렇게 편안한, 편안하지 않는 몸을 자각(감각)하고 받아들이며 깊은 호흡으로 움직임을 열어간다.

2시간 남짓 단계별로 진행되는 아주 느린 움직임은 내 몸을 돌아보고 자각하는데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움직임이 잘 되고, 못 되고 그런 감정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가는 게 이 움직임의 시작점이기에 2시간이 지나고 나면 가장 먼저 드는 느낌과 생각은


행복하다. 편안하다.


이다. 온전이 나의 시간에 집중해 내 감각을 열어두고 나와 마주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걸 하면 '어디가 나아진다'. '이뻐진다'. '좋아진다'라는 성취 기준을 드 높이는 욕망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어디에 있을까.

교육이라는 겉모습을 걸치고 '이래야지', '이렇게 움직여야 해'. '정확하게 해 보아요'라고 이쁘게 훈육(훈련)하는 가르침과는 전혀 상관없는 시간이 어디에 있을까.


내가 마주하는 느린 움직임은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움직임의 방향은 안내해 주시만 그 움직임의 기준이나 결과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자각하는 데로 움직이다 보면 그 끝에 나 자신이 스스로 그 움직임을 마주하게 되고 내가 어떤 것에 반응하고 지각하는지 그리고 인식한 데로 움직일 수 있는지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뿐이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결국,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편안하고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유튜브에 떠도는 무수히 많은 영상들, 그것은 선생님의 시범을 보고 그 몸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따라 하는 과정이 수반된다. 취미 발레 영상도 많은데  결국에는 어떤 움직임이 '좋다', '정확하다'는 기준에 따르기 위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선생님이 아주 상세하게 가르쳐 주는 방식인 것이다.

그것은 내 몸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내 몸이 만들어 내야 하는 움직임이 목적이 되어 내가 그것에 맞춰가는 형상이 된다.

그리고 '날씬하다', '이쁘다', 이래야 '우아하다'라는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내 몸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명 성공을 위한 자기 계발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시켜서 어떠한 성과를 거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의식을 갖지 못한다.

자신은 노력했고 많은 시간을 여기에 쏟았으며 최선을 다했기에 진정한 자기 계발이 되었다고 여길 것이다. 삶을 태하는 가치와 방향이 다르기에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도 다르게 드러나는 것이다.


옛 성인들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뜻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다. 그것이 뭘까? 무슨 뜻일까? 몸을 마주하는 우리도 몸을 꾸미기보다 잘 돌보고 가꾸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해 가는, 때로는 노쇠해 가는 내 몸이 세상을 견디는 그 초연함에서 우리는 한결같이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곁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가꾸기이고 돌봄이며 배려일 듯하다.





작가의 이전글 명절 음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