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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May 18. 2024

"검은 사슴"을 읽고

검은 사슴은 무엇인가

탄광촌에서 일하는 광부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깊은 땅속 암반 사이사이로 기어 다니며 사는 짐승이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논들을 다 합쳐보면 수천 마리나 되지만 가족을 이루지 않고 늘 외톨토리로 다니지. 생기기는 사슴 모양으로 생겼는데 온몸에는 시커먼 털이 돋았고 두 눈은 굶주린 범처럼 형형하다. 바윗돌을 씹어먹어 배고픔을 이기느라고 이빨은 늑대 송곳니처럼 날카롭고 단단하지. 이마에는 번쩍이는 뿔이 한 자도 넘게 자라 있어서 이 짐승이 걸어가는 길 앞을 관솔불마냥 훤하게 밝혀준단다. 저 월산 탄광이나 황곡 광산에서 채굴 작업을 하던 광부들이 이따금씩 이 짐승과 마주치는데 그때마다 이 짐승 평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하늘을 보는 것이 소원인 이놈은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한단다. 잡아먹히는 것이나 아닌가 벌벌 떨고 있던 광부들이 조건을 내걸지.

'네 번쩍이는 뿔을 자르게 해 다오. 그러면 하늘을 볼 수 있게 해 주마."

짐승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이마를 앞으로 내밀지. 일단 뿔을 자른 광부들은 몇 발짝쯤 짐승을 데리고 가다가 다시 조건을 내건다

'네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다오. 그러면 하늘을 볼 수 있도록 해주마."

짐승은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고 버티지. 하지만 광부들은 수가 여럿이고 짐승은 혼자 몸이니 배겨낼 수가 있나. 한 사람은 뿔이 뭉툭하게 잘라진 짐승의 이마를 잡고 다른 한 사람은 시커먼 짐승의 뒷다리를 잡고, 남은 사람들이 짐승의 뽀죽한 이빨을 뽑아내지. 거무죽죽한 피가 짐승의 입이며 턱이며 이마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 광부들은 허둥지둥 동료들의 불빛이 번쩍이는 갱도 안쪽을 향해 달려가버린단다."



검은 사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해져 오는 이야기 속의 검은 사슴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어둠의 존재이다. 어둠은 빛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전해져 오는 과거의 서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과거는 잊어야 하는 것, 결국 잊히는 것일까. 매 순간 우리는 현재를 산다. 현재를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완벽한 현재만은 존재할 수 없다.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게도 하거나 뒤로 물러나게도 한다. 잊었다고 생각한 과거의 사실이 갑자기 원하지도 않는데 불쑥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꿈에 나타난 의미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과거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는 것 같다. 그런데 과거가 암흑이라면 우리는 암흑에 있을 수 없다. 밝은 빛을 보아야 한다. 어둠을 물리쳐야 한다. 광부들이 검은 사슴의 뿔과 이빨을 없앤 것처럼.


장은 생사를 넘나드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광부들에게서 무언가를 느낀다. 상업적인 사진 찍기에 염증을 느낀 그는 아무 보수도 없지만 그들을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생사를 오가는 작업장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의 곁에서 외로움을 느낀 아내는 그를 떠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의 아내는 무너진 작업장에서 살아남은 한 광부의 딸이었다. 가출을 한 어린 여동생을 찾았던 오빠 명윤은 동생의 생사를 모른 채 사는 현재가 행복할 수 없다. 글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절망감으로 자살을 생각하는 그는 우연히 만난 남과도 같은 의선을 찾으려고 강원도 탄광마을을 찾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언니의 죽음과 더불어 어머니의 죽음을 감당했던 동생 인영은 혼자 외롭게 산다. 남들과 인간적 소통을 하지 않는 그녀도 의선에게 잠깐 곁을 준 이후 명윤과 함께 의선의 고향까지 알아내며 그녀를 찾기 위해 애를 쓴다. 의선은 주민등록증도 없는 아이였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으러 딸과 아들을 두고 떠났다. 신고도 되어 있지 않은 산골마을 소녀는 학교에 다니지도 못했다. 산골에서 나와 중학교 사환으로, 봉제공장에서, 일식집에서 품을 팔며 서울까지 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기억을 잃었다. 그녀를 도와준 인영의 집에서도, 명윤의 집에서도 가출을 한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이 버린 고향을 찾아간다. 기억이 나지 않은 채로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고향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곳이 고향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 과거는 미화되는 것인가. 과거는 자연스럽게 우리 몸에 새겨져 있나 보다. 과거의 빛으로 물들여져 있거나 과거의 언어를 되풀이해서 암기를 했거나. 암흑으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햇빛으로 나와도 검은 사슴은 죽기 때문이다. 해바라기처럼 햇살 앞에서만 있던 의선이는 결국 해가 들지 않는 검은 골짜기로 떠났다. 그런데 그녀가 남긴 어둠의 빛은 강렬했다. 우울, 슬픔, 무기력, 인내, 침묵의 힘은 강했다. 나는 원초적인 어둠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보았다. 지독히도 절망적인 탄광촌의 환경은 숨을 쉴 수 없는 도시의 환경과 다를 바 없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과 지독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혼을 파는 현대의 상황과도 다를 바 없다. 암흑과 빛은 공존한다. 암흑이 있어야 빛이 있고 빛이 있어야 암흑이 있다는 명제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명윤과 인영이가 의선이를 찾아다니는 기나긴 과정이 인상 깊었다. 우리는 찾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도, 정해 놓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도 살고 있다. 침묵을 하거나 인내를 하거나 도망치려고도 하면서 암흑을 지나치고 있다. 마음속의 어둠을 우리는 다른 사람과 살을 맞대고 싶다는 마음으로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아래층에 근무하는 제약회사 사환 의선이에게 인영은 뜬금없이 일기를 쓰는지 묻는다. 사실 의선이는 글자가 아닌 마음으로 일기를 쓰고 있었다. 기억을 잃어도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되풀이하며 생각해 내고 암기를 했다. 암흑의 빛으로 서로의 닮음을 알아본 의선과 은영은 그렇게 연결이 되어간다.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서 치유하려는 모습은 타당하지도 적합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함께 하는 시간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빛으로 빛난다. 결국 의선이를 찾지 못하지만 의선이는 다른 선한 사람들에게 다른 보살핌을 받는다. 검은 사슴이었던 의선이는 그렇게 살고 있다.


어둠은 나쁘고 피해야 하는 것일까. 고통을 즐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제발 지나가 주기를 바라며 회피하거나 도망치려고 할 것이다. 고통을 대하는 태도는 모두 다를지 몰라도 그 고통이라는 마음이 끔찍하다는 사실은 똑같다. 어둠은 자리 잡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을 망가트려 기억을 없애기도 하고 인격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고통은 깊게 파고들어 텅 빈자리를  만든다. 그렇다. 다행히 그 빈자리가 생긴다. 온통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빈자리에서 나는 어둠을 응시한다. 내가 고통스럽다는 사실만 응시한다. 오래 침잠하면 빈자리가 생기고 고통은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무언가는 에너지라 생각한다. 검은색의 에너지도 분명 있다. 긴 침묵이 더 힘을 발휘하고 긴 인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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