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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May 20. 2024

"웃는 남자(황정은)"를 읽고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있어

"이해한다"는 말을 나는 언제 쓰나. 정말 이해를 한 것인가. 아니면 위로를 한 것인가. 나 자신을 이해할 수도 없는데 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기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우리에게 "이해한다"는 말의 위로는 가증스러운 정당화가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더 괴로운 마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다. "나도 그래"라는 말 정도가 나만 이기적이지 않다는 공동의 위로였다. 그러나 우리는 지워지지 않는 숯 같은 흔적이 새겨진다. 그렇게 살다가 문득 상처가 돋보인다. 또 비슷한 일을 겪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라"라고 다그친 아버지는 말을 하려고 애를 쓰는 해지 아저씨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을 한다. 평소 당신의 잘못이라는 말을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이다. 조용한 아버지는 잘못이라는 말에 왜라는 분노로 바뀌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후회하는 일을 고백했다. 교통사고가 나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중 해지 아저씨는 살려고, 또는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어서, 또는 무서워서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버지도 말을 하는 것이 해지 아저씨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에너지를 아끼라고 말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런 마음도 아닌 것 같다고 아버지는 고백한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에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왜 그랬을까.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나"는 사랑하는 사람 디디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혁명"이라는 말을 내뱉고 스스로 깜짝 놀랐다는 디디, 왜 놀라야 하는지 그 사실이 더 놀랍다고 말하는 디디는 늘 "나"가 퇴근하는 시간 옥탑방에서 나와서 "나"를 기다린 사람이다. 둘은 버스를 타고 가는 중 교통사고를 당한다. 버스는 추돌 후 한 바퀴 돌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나"는 디디를 잡지 않고 자신의 가방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나"만 살았다. "나"는 왜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신을 이해한다는 사람들의 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는 단순해지려고 애를 쓰지만 잘 되지 않는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있어"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작은 행동은 자신을 드러낸다. 작은 행동이라 그냥 지나치지만 작은 것이 모여 큰 행동을 하게 만든다. 늘 비겁한 사람은 결정적일 때도 비겁하고, 늘 용기 있는 사람은 용기 있는 행동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지 뭐, 인간은 나약해, 되풀이되는 변명 같은 위로와 공감에 지친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조금 한 걸음 나아가 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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