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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승 Apr 19. 2020

릴레이 소설을 써 보기로 했다.

 언제 한번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릴레이 소설 같은 거 한 번 써보는 건 어때요?


 두서없이 던져진 내 제안은, 오르는 취기와 함께 점점 구체화되어, 멤버를 정하고 우리들만의 작은 규칙들을 몇 가지 세워두고선 곧 실행에 옮겨졌다.

 다섯 명의 멤버들이 누군가의 글을 이어받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는 이 '게임'은 어쩐지 부끄러우면서도 우리 사이의 내밀한 결속력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7일 안에 한 편의 이야기를 써 다음 주자에게 글을 넘겨야 하고, 그다음 주자 역시 이야기를 이어받아 7일 안에 다음 주자에게 넘겨야 한다. 여기까진 일반적인 릴레이 소설의 방식을 띄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룰을 하나 추가했다.

 내가 아는 이야기는 내게 글을 넘겨준 사람의 것까지만이라는 것. 즉 멤버 A -> B -> C -> D -> E의 순으로 글을 써 이야기를 건넨다고 했을 때, C는 B에게 전달받은 글을 볼 수 있지만 A가 쓴 글을 보지는 못한다. 또한 C의 글을 이어받을 D 역시 C의 글은 볼 수 있지만 A와 B의 글은 보지 못한다.

 이 근본 없고 괴랄한 방식을 택한 이유는 릴레이 소설이 주는 즉흥성과 비통일성, 작가의 개성을 최대한 극대화하고자 하는 취지가 담겨있다(라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다섯 명이서 두 바퀴를 돌기로 했으니까 멤버 당 두 편씩, 총 10편의 파편화된 이야기가 한 토막 글로 수렴될 것이다. 내가 힘들게 써 놓은 이야기가 어떤 똥글이 되어 돌아올지, 혹은 내가 싸 놓은 똥글이 어떤 사연과 귀감을 가진 근사한 이야기로 내게 돌아올지 생각해 보면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다음의 글은 내가 첫 주자 A에게 이어받아 쓴 글이다. 전체 이야기의 2/10 편에 해당한다.



 가파르게 고도를 오르던 비행기가 목표로 한 지점에 도달했는지 삽시간에 잠잠해졌다. 잠깐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승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경직됐던 불안감을 부산한 몸짓으로 대신해 안도감을 표했다. 승무원들은 늘 그렇듯 여유롭게 기내를 둘러보곤 홀연히 사라졌다. 그다음엔, 어느샌가 소복이 내려앉은 먼지처럼, 침묵과 고독이 이곳에 슬그머니 내려앉는다. 당분간은 어떤 소란도 없을 것이고, 비행은 아무 탈 없이 진행될 것이다. 나는 위협과 무질서가 거세된 이 안온한 상태를 꽤 오래전부터 거슬려했다. 하지만 내게 이러한 감정이 생겨난 원인에 대해선 나조차도 명확히 규명하기가 어려웠다.

 이것은 수년 , 여지없이 제주에서 서울로 향하던 비행을 하던  우연히 생겨나, 이후 해를 거듭하면 할수록 점점 확고해져 갔다.  감각은 어슴푸레 개구리처럼 모호하지만 명확히 인지되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고, 무신경할  가장 예리했으며, 촉각을 곤두세울  되려 무디었다.  잡힐    손을 뻗으려 하면 할수록 폴짝폴짝 달아나기만 했다. 하지만 다행히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에서야 알게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의 삶에 정작 필요한 것은 행복이라든지 평온, 혹은 안정감 같은 것들 따위가 아니다. 지척에서  목덜미를 움켜쥐고 언제라도 얄팍한 육신을 파고들어 가쁜 생명을 앗아갈  있는 것들. 그러니까 불행과 고통, 분노와 치욕, 불안과 의심 같은 것들이야말로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 도화선이며 출발지라는 것이다. , 육중한 기체가 가파른 고도를 매섭게 오를  발생하는 진동과 저항, 공명과 반발이야말로 현실의 육지와 실체 없는 상공을 잇는 매개이고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찰나의 순간,  번뇌의 항로를 거치는 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이상에 도달할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이상에 당도한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벨트를 풀어헤친  편안해진 몸과 마음으로 낱말 퀴즈를 풀거나 잠을 청할 뿐이다. 언제든 추락할  있다는  잊은 ,  스스로 속박하고 불안과 공포에 몸이 겹겹이 둘러싸여 옴짝달싹  수도 없었다는 순간이 있었단  망각해버리곤 마는 것이다.  어떠한 동요도 없는 () 상태, 우주의 질서가 파괴된  정적인 상황이야말로 되려 내겐 소름 끼치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내 좌석에 앉은 노파를 슬쩍 쳐다봤다.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얕은 웃음소리와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그녀의 몸짓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녀는 휴대폰 앨범의 사진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륙하기 전, 선반에  올리는 것을 도와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무시했던 탓인지 그녀에게서 풍겨 오는 향수 냄새가 냉랭하고 도도하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정리하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제주도엔 여행을 목적으로 다녀온  같았다. 사진  장엄한 산방산의 절경 앞에 유채꽃이 만발해 있고  중앙그녀와 함께 어떤 노년의 남자가 있었다. 둘은 꽤나 다정해 보였다. 주말 부부일까? 아니면 불륜일까? 비행기엔 그녀 혼자 탑승했었다. 아니 어쩌면 불륜일 확률이 높겠다, 속으로 생각했다. 주말 부부라면 굳이 짐을 많이 챙길 필요도 없을뿐더러 이렇게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길 이유도 었을 것이다. 또한 나는, 사진 에선 보이지 않던 그녀의 반지가 지금 내 옆에서 힘없이 반짝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생각 없이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던 나는 약간의 경멸과 처연함을 그곳에 남겨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주에선 어지간히 정상적인 일들이 안 일어나네'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주에서 A, 하필이면  순간에 다시 만나게  줄은 몰랐다. 결혼 준비를 위해 방문했던 제주에서 이틀간의 일정은 눈코  새도 없이 정신없었다. 제주에 계시는 부모님을 만나 뵙고, 결혼 이야기를 나누고, 예식장을 둘러보기만도 빠듯했다. 간만에 부모님과 근사한 저녁을 먹기 위해 들른  레스토랑에서 A 연인과 함께였다. 한동안 소식을 모르고 지냈었는데 별안간 이렇게 마주하다니.  레스토랑이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있는 곳이 결코 아님을 염두에 둬봤을 , A 지금 하는 일이  풀려 성공했거나 그런 연인을 곁에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나는 A 대한 기억과 추억을 끊임없이 되감고 음미해 왔었다. 기억이란 것은 음악처럼, 끊임없이 따라부르고 재생할수록 닳고 닳아 그 감흥이 이내 무뎌진다는 것을  알기에, 니체의 말처럼 나는 스스로 망각하는 능력을 갖춘  받은 인간이라 생각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상공을 부유하는 편안함에 길들여지기 싫어 계속해서 고도를 오르는 쪽을 택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불편함과 거북함마저 익숙해지는 때가 오겠지, 하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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