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아직 시작도 못했다.
무언갈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정주행을 위한 드라마 한 부작을 넷플릭스에서 고르는 것만큼이나 참 손쉬운 일이다. 또한 무척이나 지리멸렬하고 고달픈 일이다. 그 한 부작 드라마에 매몰될 시간적, 정신적, 체력적 기회비용을 일일이 손익계산하고, 이 배우가 나와서 싫어, 소재와 설정이 마음에 안 들어, 주제가 너무 가벼워 혹은 너무 무거워, 라는 식의 소거를 거친다. 그리고 그 지난한 과정을 거치다 보면 내게 남는 것은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흘려보낸 아까운 시간과 '다시보기 추천 콘텐츠'를 멋쩍게 기웃거리는 내 모습이다.
나는 시작이 반이라는, 그 상투적인 격언에 대한 체감을 잘한 탓에, 그 육중한 압박과 부담감에 시작조차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었다. 여행을 가기에 앞서 여행지에서의 일정을 계획하고, 숙소와 식당을 알아보고, 그 지역에 대해 공부하고,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소중하고 힙한 여행을 위해 검색, 그리고 또 검색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는 일이(심지어는 머릿속으로 그 과정을 떠올리기만 해도) 지루한 게임을 하는 것처럼 귀찮고 무기력하게만 느껴져 여행조차 포기할 뻔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 게임이나 하자, 하고 게임을 켜는 날엔, 새로 만들 캐릭터의 이름을 정하느라 골똘히 생각하고, 또 다시 검색하고, 심지어는 책까지 펴보고야 만다. 정말 이젠 모든 것이 귀찮아, 넷플릭스나 보자 하고 침대에 드러누워선 또 다시 멋쩍게 기웃거리는 일을 택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 오늘 하루 무언가 시작한 건 없지만, 시작을 위한 시작은 했다. 중얼거리곤 지쳐 잠이 든다.
이직을 할까, 퇴직을 할까. 새로운 취미를 가져볼까. 공부를 다시 해볼까. 꿈꿔 왔던 사업을 시작해볼까. 이미 시작된 내 인생에서 사실 무엇하나 제대로 시작된 게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인생의 커다란 변곡점이 될 중요한 사건의 출발선 앞에서, 불판 위의 돼지껍데기 마냥 위축되곤 했다. 그래도 언젠가 한번 펑! 튀어 올라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은 욕심은 그득했지만, 날아 오를 추진력을 얻기까지 그 뜨거운 불판의 열기를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무서웠다. 욕망만 많고 야망은 적어서, 나는 언제나 뒤에 몰래 숨어 자위하기 바쁜 사람이었다.
작년 이맘때쯤, 군대 훈련소 생활을 같이 했던 동기 둘을 상수역 근방의 한 술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었다. 한 친구는, 자신의 학부 전공이랑은 다른 전공의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고, 다른 한 친구는, 이번에 새로 취업하게 된 회사에서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 해줬다. 그래, 너희들 모두 인생에서 새로운 시작들을 마주했구나, 축하한다, 마시자, 짠! 당시 나는 동기들과 달리 한 직장을 3년 째 다니는 중이었다. 회사의 대우에 불만족스럽다거나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며, 단편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며, 독립 출판을 해보고 싶다며 갈증을 느끼고 있던 내게 그날 동기들과 마셨던 소주는 씁쓸한 뒷맛과 함께 더 큰 목마름을 가져다 주었다.
동기들에게 질투가 났다거나 시작조차 못하는 내 자신이 비참해졌던 순간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도 얼마나 많은 시작을 위한 시작을 거쳤을지, 수없이 겪었을 갈등과 가슴앓이를 얼큰하게 오르는 취기보다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우리가 그날 안주 삼았던 뭉티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뭉텅뭉텅 썰어 놓은 그것처럼, 그렇게 뭉텅뭉텅 시작하는 법을 알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혼자 생각했다.
과음한 다음날 보복하듯 밀려드는 갈증과 숙취처럼, 그날 들이켰던 새로운 도전에 대한 갈망이 나를 또 시작을 위한 시작으로 이끌었다. 인생 이모작을 위해 책을 찾아 읽고, 검색을 해보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역시나 시작한 건 아직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시작점이라 부를 만한 시작이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걸까? 글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내게,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한 것이 시작이었을까? 아니면 그 어렸던 시절, 잠들기 전 남몰래 일기를 끄적이던 때가 시작이었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게 시작이었을 테고, 또한 바로 그 시작을 위한 시작이진 않았을까. 나는 늘 언제나 새로운 시작점 앞에 놓여 있었고, 그 시작점이 또 다른 시작의 시작이 되는 건 아닐까.
그래, 그렇게 묵묵히. 엄중히 고민하고 면밀히 고찰하자. 깊이 사유하며 충분히 머뭇거리자. 그렇게 시작을 위한 시작을 하다 보면 결국엔 어떠한 종착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비록 무엇하나 제대로 시작한 건 없지만서도,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것 또한 없었다. 모두들 새로운 시작 앞에서 두려워하고, 망설이고, 되돌아가지만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꼬옥 말해주고 싶다. 이미 시작한 거라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잘 해내고 있다고.
나 역시 오늘 이렇게, 지금 이렇게,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또한 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시작일 것이라고, 언젠가 이 순간이 새로운 시작점으로 기억되는 때가 올 거라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