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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일 Aug 11. 2020

예술모독

페터 한트케 <관객모독>,  루벤 외스툴렌드 <더 스퀘어>

 『더 스퀘어』는 영리하고, 『관객모독』은 영악하다. 두 작품은 각기 영화에 대한 영화, 희곡에 대한 희곡, 혹은 예술에 대한 예술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메타극적 형식을 띄고 있다는 공통점과 함께 그것들의 본질, 그러니까 예술과 언어와 관용과 자비와 희곡과 영화와 가식과 위선 같은 것들의 본질에 대해 면밀히 탐구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더 스퀘어』는 영리했고 『관객모독』은 영악했을까.



랑그의 세계와 파롤의 세계  

언어학자 소쉬르는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언어를, 사회 안에서 긴 시간을 두고 축적된 언어(langue, 랑그)와 그 일부를 빌려 쓰는 개인들의 언어(parole, 파롤)로 구분하고, 진정한 언어 연구의 대상은 랑그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언어가 세상 사물과 아무 관계없는 기호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 (민음사, 『관객모독』 p.73-74)


 한트케가 심취했던 소쉬르식 언어철학은, 그저 껍데기거나 단순한 기호일 뿐에 지나지 않는 파롤의 세계와, 보다 독립적이고 이상적이며 관념론적인 랑그의 세계로 나눈다. 이는 19세기까지 언어론의 강력한 전제였던 '언어는 세계의 모방'이라는 기존의 개념을 단호히 거부하는 행위였다. 소쉬르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바다'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 음가인 [바다]는 단순히 한국어 낱말로 이루어진 기호, 즉 파롤인 것이며 '바다'의 실질적 의미인 '지구 위에서 육지를 제외한 부분으로 짠물이 괴어 하나로 이어진 넓고 큰 부분'은 랑그가 된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인 인과도 당위도 없으며 우리가 바다를 바다라고 부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파롤과 랑그의 관계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바다'라는 단어를 보거나 [바다]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지구 위에서 육지를 제외한 부분으로 짠물이 괴어 하나로 이어진 부분'인 바다를 떠올리게 된다. 이는 전혀 다른 두 세계가 구조화된 언어 체계 속에서 어떻게 작용되는지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영화 『더 스퀘어』의 전시물 '더 스퀘어'는 사각 틀이라는 구조물을 통해 세계를 이분화한다. 신뢰와 배려,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진다는 그 성역은 소쉬르의 연구 대상이었던 랑그의 세계를, 그 성역의 바깥은 무의미하고 단순한 기호에 지나지 않을 세속적 공간, 즉 파롤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분이 이렇다고 해서 '더 스퀘어'를 기준으로 속과 성을 도식적으로 분할하는 위험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랑그와 파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에게 자유롭지 못하다. 둘은 서로 약속된 체계 내에서 의미작용되며 상호 보완된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더 스퀘어'를 통해 무엇을 의미작용하고 상호 보완할 수 있을까. 사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이번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중심 메세지는 북유럽 먹물들의 위선과 편견에 대한 고발도 아니고 반짝이는 네온 조명으로 둘러싸인 사각 틀 구조물도 아닌, 우리가 영화를 보는 동안 실질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또 다른 사각 틀, 바로 영화 스크린이라는 진정한 '더 스퀘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그 사각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는 '영화'야말로 기실 세계를 신뢰와 배려로 이끌어주고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쥐어준다는 메세지를 적나라하게 던지는 것이다. 또한 서로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랑그와 파롤처럼, 우리 역시 영화를 통해 의미작용하고 상호 보완해 나가며 보다 이상적이고 친절한 세상을 구축해 나가자는 감독의 영리하면서도 명료한 속내가 들리는 것만 같다.



관중모독

함께 본 영화 『더 스퀘어』 - 루벤 외스틀룬드

여러분은 처음부터 어두운 객석에서 연극을 보고 즐거워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우리가 여러분을 응시하고 말을 거니 심기가 불편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현재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보내는 이 시간이 바로 여러분의 시간임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중략) 여러분은 이 작품의 악한들이고 동시에 영웅들입니다. - (민음사, 『관객모독』 p.29 / p.44)


 우리는 예술에 있어서 언제나 관망하는 이방인, 객체로서 존재했다. 하지만 『더 스퀘어』와 『관객모독』은 우리를 그 먼지 쌓인 왕좌 위에서 끌어내려 심판대 한복판에 던져 놓아 단죄하고, 기어코 모독하고야 만다. 두 작품 안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연출과 행위들을 통해 우리의 역할을 관망하는 객체에서 참여하는 주체로 역전시키면서 예술이란 것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게 한다. 또한 이것은 『더 스퀘어』의 이야기에서 보여지듯, 예술뿐만 아니라 자비와 용서, 관용과 이해에 대한 측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지갑과 핸드폰을 찾고 나서야 편의점 앞의 노숙자에게 시혜 내리듯 돈을 적선하던 크리스티안의 모습은 따듯한 공감과 애틋한 연민의 발로라기보다 얄팍한 오만과 갸륵한 치기에 가까워 보인다.

 『더 스퀘어』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였던 올렉의 행위 예술 장면은 마치 모든 위선자들에 대한 호된 일갈과도 같다. 많은 이들이 환상을 품고 있던 상징적인 나라의 상징적인 공간에서 벌어진 그 행위 예술은, 도대체 어디까지가 행위이고 어디까지가 예술인지 가늠조차 안 되고, 그 공간의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마치 (넓게는) 선진화되고 세계를 선도해 오던 국가들, 혹은 지식인들이 그들 스스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믿고 그러한 선택으로 구축했던 어떠한 산물들―예술, 정치, 사회, 안보, 체계―이 종국에 자신들의 통제권을 벗어나 걷잡을 수 없어졌을 때의 모습을, 또한 (좁게는) 불의와 부조리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알량한 자존심을 능숙한 자기합리화로 달래는 위선적인 소시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떠한 대처도 해결도 없이 그저 요지 부동하며 결국 선량한 약자가 앞설 때까지 기다리고선 무자비한 폭력으로 사태를 진압하는 모습이 참으로 애처롭기만 하다.



예술모독

"미술관에 뭔가를 놓으면, 그 물건은 저절로 미술 작품이 되나요? 가령 기자분의 가방을 여기에 놓는다고 치죠. 그러면 가방은 미술 작품이 될까요?" - (영화 『더 스퀘어』 中)

 『관객모독』은 언어를 통해 문학(희곡)의 속내를 들여다본 작품이라 볼 수 있고, 『더 스퀘어』는 예술을 통해 사회(인간)의 속내를 들여다본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언어와 예술을 극치까지 몰아붙여 탐구하려 했던 대상의 본질을 꿰차고자 했다고 여겨진다. 인간이나 사물, 나아가 예술이나 추상적인 관념 같은 것들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일찍이 고대 그리스 시대 때부터 존재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다뤄지던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그래서 예술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정의 내리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그 무언가의 본질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본질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절대적으로 불변하며 자체로 완벽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해 정의된 본질은,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로써 범우주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한다. 이 말인즉슨, 예술의 전당 앞을 지나다니는 개미들도 자코메티의 조각을 보고서는 황홀감을 느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가치를 다른 생명체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이 비약이라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의 틀에 갇힌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지구는 46억 년, 우주는 138억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존재했고 우리는 그 억겁의 시간 중 찰나의 시간만을 향유하는 중이다. 미생물은 십 수억 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했으며, 우리가 지구의 주인이라고 믿는 건, 오만하고 방자한 구시대적 사고이다. 하물며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서 봤을 때, 예술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그저 호모 사피엔스가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과학적으로 무엇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질량이란 것을 가져야만 한다. 만일 질량이 없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코메티의 조각상은 질량을 지니지만 예술은 과연 질량을 가지는가?

 이러한 매커니즘 속에서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조각상 자체가 예술 그 자체여서 예술품이라기보다, 그것을 감상할 때에 우리 몸 안에서 작동하는 신경계 전달 물질의 분비가 그것을 예술로써 느끼게 만들어 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또한 그러한 현상은 결국 질량을 가지며 '실존'하는 원자들의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환원주의적 관점으로, 예술이란 건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고, 다 가짜다!라고 논지를 펼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이란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정의될 수 없기에, 되려 모든 것이 다 예술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은 순전히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도 말이다.

 작년인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님이 마블 영화를 가리켜 '그것은 시네마가 아니다'라고 언급했던 사건이 있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영화계 거장의 발언이기에 할리우드 내에서도 정말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 역시 정말 좋아하는 감독님이고 이 감독님의 거의 모든 영화를 좋아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쉽사리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세상엔 단지, 모든 유형의 위로를 위한 모든 유형의 영화가 존재할 뿐이다. 어떤 영화에게서 위로를 얻고 어떤 영화에게서 기쁨을 얻을지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크리스티안의 위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렇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함께 본 영화 『더 스퀘어』 - 루벤 외스틀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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