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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24. 2017

내 노력이 콜라 한 잔보다는 비싸지 않나요?

버스킹 예술가의 한마디

잠이 오지 않을 땐 글을 써야 한다. 내일 아침에 분명히 자책하며 눈을 뜰 텐데 글이 남아 있으면 죄책감이 2% 정도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카페인도 아니고 아직 쓰지 못한 원고도 아니고 곧 시작할 학교생활 때문도 아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몇 주 전 버스킹 페스티벌이 열렸다. 촌스럽게도 난 지금까지 버스킹을 거리 연주를 가리키는 단어로 알고 있었다. JTBC '비긴 어게인'에서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내 귀에는) 완벽한 화음을 만들어내는 감동에 낭만까지 크게 얹어서 '버스킹은 멋지고 쿨한 예술가의 무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버스킹 페스티벌은 그 착각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풍경이 워낙 멋진 동네라 그건 접어두고라도 박수도 잘 안치는 관광객들 틈 사이로 어떤 여자가 작은 상자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뭘까, 서로 어깨를 들썩이며 누군가 '당신은 나에게 인생 최고의 순간을 선물해줬어!'를 외치며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절정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그 순간에, 몸이 바싹 마른 중년의 여성이 자신의 몸뿐 아니라 축구공까지 상자로 밀어 넣었다. 아름다운 배경 음악도 없었고 열정적인 관중도 없었다. 다들 숨죽여 그녀가 손을 흔들길 기다렸고 익숙한 퍼포먼스를 마친 그녀는 여유롭게 상자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정해진 무대가 아닌 즉석에서 사람을 모아놓고 공연을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게 자신의 운명이며 아마 죽을 때까지 이러고 살지 않겠냐며 하하 웃었다. 그녀의 밝은 웃음과 달리 관중은 약간 숙연해졌다. 누군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큰 무대에 서고 싶지 않겠는가. 스텝도 없고 직원도 없는 항구 근처 아무 공간에서 매번 엄청난 짐을 스스로 끌고 다니며 처음 본 사람을 향해 웃어야 하는데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 


누구나 가끔은 작은 상자에 몸을 우겨넣어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하는지도 모른다.

짧은 공연이 끝나자 다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잠깐 고민했다. 팁을 얼마나 줘야 하지? 


한국에서 길거리 예술가를 가끔 만나더라도 '얼마를 줄지' 별로 고민해본 적은 없다. 맘에 드는 공연이라면 지갑에 대충 있는 동전을 모아서 주기도 했고 내가 받은 감동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면 지폐 몇 장을 선뜻 내밀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히 받는 입장에서는 다른 계산기가 휙휙 돌고 있었을 것 같다. 교통비와 간단한 식비를 제하고 최저 수당만큼은 벌어야 하지 않을까 등등.. 그래도 그들이 입 밖으로 돈 얘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은 없다. 


하지만 방금 상자에서 나온 그녀는 땀을 닦으며 분명히 얘기했다. 


저는 이 상자에 지난 20년간 몸을 맞추기 위해 매일 혹독하게 단련했습니다. 

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증거는 저 말곤 이 공연을 하는 버스커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옆 푸드트럭에서 콜라와 햄버거를 팔더군요. 콜라는 5달러고 햄버거는 10달러입니다. 제 공연이 콜라 한 잔 값도 못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10달러를 주신 분들께는 작은 선물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그녀에게 얼마를 주겠는가? 아니면 그냥 엉덩이만 털고 일어나겠는가? 내가 관찰한 게 맞다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돈을 내고 갔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대부분 5달러 이상을 냈을 것 같다. 그리고 푸드트럭을 지나고 햄버거를 사 먹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엄청난 크기의 햄버거에는 10달러가 아깝지 않은데 나는 저 공연을 보고 왜 망설였는지.


유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the Sketchbook Project'

예술가에게 누군가의 후원이 없어도 스스로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사회라면 5달러 이상을 달라고 하는 그녀에게 오히려 고함을 칠지 모른다. 사무직, 생산직, 주부, 프로그래머 등 수많은 직업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는 떳떳하게 직업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단지 주된 생산물이 눈에 보이거나 시장에서 가치가 매겨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 주변을 불편하게 만든다. 가장 창의적인 활동을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로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직장인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불공평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불공평함을 깰 수 있는 도구는 청중인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제 뉴욕에 살고 있는 친구가 MOMA에서 ZINE에 참여한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ZINE을 통해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을 모아 자유롭게 책을 낼 수 있고 사람들과 만난다. 뉴욕이 그 무대가 될 수 있다는 건 아마 그만큼 예술에 호의적인 청중이 많기 때문이고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다면 후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의 층이 꽤 두텁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곧바로 한국의 독립 출판계를 떠올렸을 때 마음이 답답한 것 역시 같은 이유다. 우리는 여유가 없다. 매일 먹는 달걀도 믿을 수 없고 매달 사용했던 생리대에도 발암 물질이 가득했다는 뉴스로 떠들썩한 나라에서 '#예술가, #후원'이라는 단어를 감히 꺼내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다. 최근의 경험을 통해 우리 손으로 바꿔볼 수 있다는 믿음이 아직 살아있다는 건 반가운 신호다. 밑에서 위로, 약한 자에서 강한 자로, 사람들은 중력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며 새로운 일을 만들어 왔다. 


시간이 지나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짧은 공연을 마친 예술가에게 모든 사람이 거리낌 없이 박수를 보내고 후원을 하는 모습에 감동받아 밤에 잠도 안 자고 글을 쓰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가슴이 다시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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