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거절했었어>
저희 부부는 4년간 전세로 지냈어요. 오래되긴 했지만 멀쩡하던 집이었어요. 큼지막한 창, 쏟아지는 햇살, 펑펑 통하는 통풍이 좋아서 구옥빌라임에도 냉큼 구매를 해버렸죠. (주변의 모든 크고작은 지인들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를 무릅쓰고) 아니 그런데 어떻게 딱 집을 사자마자, 결로와 곰팡이가 폭발하냐고. 마치 버스 안와서 택시타는 순간, 버스가 출현하는 그런 타이밍이잖아. 어휴
안그래도 오래된 집이라 이대로 살 순 없고, 어차피 언젠가 한 번 고치긴 해야했어. 안되겠다 이때다 싶어 아주 대공사를 시작했죠. 그냥 도배장판 수준이 아니라, 천장과 바닥을 모두 뜯어내고 수도, 가스, 단열, 설비공사까지 모두 진행하기 이른 것이죠.
게다가 업체 불러서 턴키로 맡긴 것이 아니라, 저희가 직접 셀프인테리어로 진행했거든요. 업자 분들 한 명 한 명 서치해서 찾아서..어레인지하고...피똥싸는 바로 그거.
이 난리통을 하다보면, 오만육만 것들을 사야하고 정말 많은 정보들이 필요하단 말이죠. 인테리어 정보는 셀인카페에서 찾고, 당근과 지인들을 활용해 노하우를 얻고... 구매는 어디서 해야겠어요?
맞아요. [오늘의집]이죠.
인테리어 레퍼런스 찾는다, 소품 구매한다 어쩐다 해서 하루에 40번씩은 들어가봤던 것 같아요. 그렇게 미친듯이 오늘의집 죽돌이 모드였는데, 갑자기 메일이 온거야. 그래서 [오? 충성고객에게 주는 이벤트인가] 싶었는데 컬처북 프로젝트 의뢰였던 거지. 이거슨 어떤 우주의 흐름이구나...싶어서 일단 연락을 드려봤어요.
그러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 이것이 우리가 1년 전에 하던 [많은 내용이 담겨진 두꺼운 책자 형태]의 컬처덱을 원하시더라고. 근데 저흰 1년전에 디자인팀을 없애고 컨설팅 형태로 바꾸면서 [책자]형태의 컬처덱은 만들지 않고 있었거든요.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아쉽지만 거절을 했었죠.
그런데, 얼마 후 P&C팀 리드님에게 다시 연락이 온거에요.
리드님의 친절한 재요청
두 번씩 연락을 주셨는데 마냥 거절하는 것도 그렇잖아요. 안그래도 매일 이용하는 서비스이기도 하고...팬심으로 방문하기에 이릅니다. 상황설명을 쭉 듣고보니 이런 내용이었어요.
1. 이미 만들어진 기본 뼈대는 있다.
2. 이것을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써보고 싶다.
3. 구성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케이스나 FAQ등을 덧붙이고 싶다.
오케이 그럼,
기본 뼈대를 한 번 살펴보고,
키워드가 명확한지 점검을 해보자!
이렇게 시작이 된 것이죠.
<이 사람들 진심이다>
기존의 문화체계는 다양한 위계가 있어서 비전, 미션, 핵심가치 이외에도 뭐라고 규정하기 힘들지만 중요한 문장들이 갈 곳을 잃고 대기줄에 서있는 상태였거든요. 이 친구들에게 이름표와 맥락을 만들어줘야 했어요.
그럴려면 먼저! 오늘의집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명확하게 잡아야 했죠.
그래서 일단, 현재 상태가 어떤지 그림으로 그려봤어요.
그래 오늘의집은 [진심]이라는 키워드가 있어요. 그게 멤버들이 인지하고 있는 오늘의집의 대전제죠. 모두가 진심을 다하고 있다!! 근데 이제...진심이란 건 사실 마음의 영역이라...[그럼 진심으로 어떻게 일해야 하는데?] 라는 질문이 생긴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문장들이 있긴 했었어요. 방향성과 목표에 대한 문장도 존재했죠. 그러나 몇몇은 섞여있고, 위상이 다른 것들도 있었어요. 포함관계에 있거나 인과관계에 있는 문장들도 있어서, 자칫 오해를 부를 수도 있었죠.
미묘하게 비슷한 단어들도 있었는데, [쓰는 사람] 입장에선 굉장히 큰 차이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선 어차피 똑같은 개념들 있잖아요. 이게 작성하는 사람은 이런 작은 뉘앙스의 함정들에 빠져 허우적 댈 수 있거든요. 특히 하나의 글을 오래오래 보고 있을수록 점점 시선이 좁아진달까... (예를 들면 '달리다'와 '달려가다' 의 미묘한 차이에 집착하게 그런.. 뉘앙스싸움이 시작되는거죠.)
이런 부분들을 과감히 생략하거나 합치거나 제거한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꽤나 기대가 되었죠. 그래서 리더집단과 하이퍼포머 구성원들을 우선대상으로 키워드 정돈과 재정의를 위한 워크샵을 준비합니다.
이런 아젠다를 가지고 와글와글 논의를 해보는 것이죠.
밤과
새벽의
시간
그 과정에서 TF팀과 [이 워크샵이 어떻게 진행되면 좋을지] 엄청난 커뮤니케이션을 한거야. 난 솔직히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스크립트나, 진행방식, 준비물, 각 프로그램의 진행목적 등을 상세히 논하는 조직은 처음봤어. 살짝 당황할 정도였다니까요.
근데, 이 분들 지금 이거 작년 중순부터 엄청 고생해서 디벨롭을 해오고 있는 거거든요. 지금까지 만들어놓은 어떤 맥락이 또 잘못 전달되면 안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흐음...고민을 하다가.
[이걸 하나하나 글로 설명드리는 것보다 직접 한 번 워크샵을 체험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퇴근 후 7시부터 밤12시까지.... TF분들을 대상으로 한 실제보다 더 빡센 워크샵이 시작됩니다. 모든 코스를 직접 경험해보면서 TF만의 정의를 내려보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어떤 문장과 개념들이 혼란을 주는 지도 이해할 수 있었죠.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너무 피곤했다는 거....
밤11시30분이 넘어가는 무렵. 서서히 멘탈이 나가는 우리들...
그럼에도 이 사람들 멈추지 않아. 심지어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은 매일 밤, 새벽, 꼭두새벽, 신새벽, 깊은 밤, 애달픈 밤..뭐 가리지 않았다고. 그렇게 준비해서, 실제 워크샵이 시작됩니다. 총4번, 각 2시간씩... 바쁜 시간을 쪼개 겨우겨우 마련한 시간들.
초상권 보호! 사실 TF분들이 좀 걱정을 하셨어요. [우리가 그리 재미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 라며 딱딱한 분위기에 대해 언지를 주시긴 했는데, 실제 운영하다보니 존잼인 분들이었음. 워크샵 4일 연속 진행했는데, 딱히 엄청 힘들다...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아요. 실제로 작성하는 내용들도 그렇지만, 오고가는 대화 속에 힌트가 무척이나 많았거든요. 멍석을 깔아주면 엄청 말을 잘하시는 스타일...
그리고, 이걸 정리하는... 또 한 번의 밤과 새벽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내용이 엄청나게 많았던 데다, 저희는 ....노트북에 키보드로 작성하는 글을 싫어해요. 글은 손으로 써야한다는 IT척화비적 사상을 지니고 있죠. 그러니 그걸 하나하나 다 타이핑해서 옮깁니다! 그리고 정리해서 레포트로 만들죠.
이런 레포트가 만들어졌습니다. 구성원들의 언어와, 기존의 언어를 비교해 비교점을 찾고 새로운 개념을 도출해 내는 거죠. 놀랍게도 그들이 말하는 개념들은 단순히 써진 것 이상의 의미들을 지니고 있었어요.
쉬워 보이지만
아무나 쓸 수 없는
단어들
컬처덱을 만들면서 한가지 든 생각이 있어요. 이게, 외부에서 보면 말입니다. 얼핏 좋은 말만 적어놓은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실제로 어떤 분은 저희가 만든 다른 회사 컬처덱을 보고 [뻔한 말들이 적혀있다] 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리고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을 거에요.
단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한 단어 한 단어가 우리의 일과 정체성, 성향에 맞는지 일일이 검증해가며 삽입해야 하는거죠. 오늘의집 컬처덱을 만들면서도 그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밖에선 이걸 어떻게 볼 지 모르겠어요. 단어는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어요. 문제는 그것에 부여하는 그들의 해석과 실제 풍경들이죠.
그들과 함께 만들면서 느꼈던 건 컬처덱을 만드는 모든 과정과 도출된 결과물의 형태가 그들의 성향과 꼭 닮아있단 것이었습니다.
일단 진중한 편이고
사람들이.... 뭐랄까 날라댕기지 않습니다.
꿈과 희망에 젖어있는 느낌보단, 하나하나 현실적이고,
디테일과 완벽한 것들을 추구해요.
고생을 하더라도, 잘 해내려는 최선화 성향도 강하고
현위치와 방향에 대한 강한 자기검열도 있었어요.
물론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란 게 있잖아요.
이 분위기가 긍정적인 긴장감으로 작용해요.
컬처덱에도 이런 성향이 그대로 묻어있죠.
컬처덱에 뭐라 썼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어투와 어떤 가치,
어떤 페이지가 들어갔는지...
왜 이 단어를 뺄 수 없었는지...
이런 맥락들이 그 회사를 보여주는 거거든요.
제이 대표님은 이 진지하고 디테일, 정성어린 태도들에게서 나오는 필연적인 부작용. 즉 속도와 임팩트의 문제에 갈증을 느끼고 계시긴 했지만, 회사가 어떻게 완벽할 수 있나요. 저는 오히려 오늘의집이 지닌 [문화적 일치감]이 몹시 놀라웠습니다.
사실 빠른 회사도 나름의 문제가 있고, 파고드는 회사도 나름의 문제가 있거든요. 그러니 어떤 문화를 좋다/나쁘다로 판단할 수 없어요. 다만, 진하다/연하다로 표현할 순 있겠죠.
오늘의집은 지금까지 쌓아올린 경험과 고민의 흔적들이 켜켜이, 그리고 곳곳에 스며들어 몹시 진한 느낌이었달까요. 설명이 길긴 하지만 하고 싶은 얘기는 [오히려 명쾌한 상태]였어요.
이제, 컬처덱의 컨셉을 뽑아내고, 핵심 문장들을 어떻게 연결할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TF와 만나 또 엄청난 회의를 계속하죠. 이걸 빼자, 넣자, 분리하자, 안된다, 남기자, 더하자, 빼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은 계속됩니다.
버전 1.1로 시작된 컬처덱 초안은... 일단 그들의 방향성과 작동방식을 구조화하고, 문장의 톤앤매너를 맞추는 것에 초점을 두었어요.
그 다음엔 이 컬처덱이 왜 만들어졌는지, 우리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이전에 비해 어떤 게 달라졌는지....지난 맥락을 더해 1.2버전을 만들었죠.
그리고 텍스트의 위계변경과 표현수정, 디테일한 변화를 거친 1.3버전.
일단 이 버전을 기준으로 구성원들에게 발표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전날 모든 TF멤버들은 밤을 새워 한 글자 한 글자 수정했다고 해요. 저는 마침 다른 회사 워크샵을 마치고 운전해서 오고 있던 중이었거든요. 근데, 18시에 타운홀 리허설을 놓칠 수가 없더라고요. 진짜 피땀흘려 만든거 발표 잘 해야할텐데... 노파심도 막 들고. 너무 궁금하잖아. 그래서, 의정부 휴게소에 차 세워놓고 핸드폰으로 구글미트 커버렸잖아.
차 안에서 화상미팅함
휴게소에서 리드님의 리허설을 쭈욱..들었죠. 통감자구이 사다 먹고싶었는데...리드님 스피치 몰입력이 대단해서 감자구이 사러 갈 시간이 없었음. 그리고 최종 리허설을 통해 최종 1.4버전이 완성됩니다.
짜잔
문화는
TF의 태도에서부터
보인다.
제가 컬처덱 작업하면서 늘 느끼는 게 있습니다. 그 회사의 조직문화를 느끼고 싶을 때....자료를 달라고 하는 건 큰 의미가 없어요. 어차피 그건 정제된 언어고, 하고싶은 말들에 불과하거든요. 그 회사의 문화를 가장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는 건 TF멤버들 자체를 보는 일입니다. 그들의 눈빛, 행동, 인삿말, 표정, 말투.... 그게 그냥 그 회사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1차적 지표죠.
오늘의집 TF는... 개쩔었어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놓치지 않으려는 꼼꼼한 일처리와 완전함을 추구했던 Joy님
좋다 싫다 명확하고, 또렷한 언어로 프로젝트에 힘을 실어준 Wayne님
저 멀리 타지에서 화상으로 함께 했지만, 어려운 질문과 선택에 서슴치 않고 구글미트를 켜고 가장 최종의 최종까지도 작은 단어를 완성시키려고 했던 Gaga님(부드럽고 온화한 커뮤니케이션은 물론)
이 프로젝트를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고, 그만큼 체력과 시간, 에너지, 애정을 쏟아부었어요. 그 언어가 완벽한지는 둘째 문제입니다. 누가 이 문화를 정립하고 퍼뜨리고 있는지가 중요하잖아요. 이 분들이라면 그냥 고대 수메르석판을 가져다놔도 좋은 문화로 바꿔낼 수 있겠다 싶었죠.
짧고 치열했던 프로젝트였습니다. 약 3개월 간의 제작작업을 마쳤고, 전사에 컬처덱이 선포되었어요. 오늘의집 컬처 탭에서 언제든 열람할 수 있는 공개형 컬처덱이죠. 그리고, 완성되고 멈춰버린 메시지가 아닌, 지금도 계속 디벨롭 되고 있는 살아있는 메시지에요. 이걸 살아움직이게 만드는 건, 지난 3개월을 함께 했던 그 멤버들과 700명이 넘는 오늘의집 구성원들이겠죠. 귀엽고 푸르딩딩한 앱때문에 푸룻푸룻하고 깨발랄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파랑의 깊이는...훨씬 깊더군요.
거절했으면, 경험해보지 못했을 진하고 깊은 [진심의 시간]이었습니다.
여담.
프로젝트 끝날 무렵, 저희 집 공사도 끝났어요 :)
진짜 두 번은 안할거다!!! 하지만, 두 번 하면 왠지 지금보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애프터모멘트 소개>
애프터모멘트는 적어도 저희가 찾아보기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컬처덱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글을 잘쓰는데, 회사를 이해하고 있고, 게다가 여러분에게 파고들어서 함께 고민해줄 기획력이 있다?
오, 이건 미쳤어.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외치는 메시지와 현장의 모습이 점점 분리되기 시작할 때.
메시지가 업무에서 멀어져 벽에 있는 포스터를 향할 때.
풍파에 깎여 우리를 지켜주는 문화의 벽이 허술해졌다고 느껴질 때.
연락주세요. 산미 있는 커피 마셔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