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맞지만, 너무 위험함
바야흐로 때는 TED의 사이먼 시넥 영상이 페이스북이 떠돌아다닐 때였을 것이다. 동심원 3개에 적힌 Why, What, How를 기억하는가. 당시 나같은 브랜딩, 마케팅, 경영전략 빠돌이들의 환호를 부르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 전에도 why와 본질은 중요했을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도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도 Why를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다만 안경잡이 시넥의 말빨과 스마트한 컨설턴트 이미지, 희대의 아이콘 잡스의 서사가 맞물리면서 Why는 그야말로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성배가 되어버렸다. 정확히는 자책의 성배라고 해야겠다.
아 내가 그래서 돈을 못버는 거였구나!
내 서비스가 그래서 안되는 것이구나!
아 왜 한달 내내 매출이 34,000원인지 이제야 알겠다!
why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야!
모든 서글픔의 이유가 Why를 찾지 못해서라는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미지의 초심으로 돌아가 '본질'에서부터 다시 고민이 시작된다. 이게 뭐 잘못됐나? 원래 막히면 돌아가려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우회하든 왔던 길을 되돌아가든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있을 순 없다. 틀린 길을 조까라며 강인하게 걸어나가는 야수의 심장은 흔치 않다.
다만 why는 그 속내를 쉽사리 보여주지 않는다. 길을 잃기 쉬운 미로같고, 가는 길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고, 우린 그걸 피하는 법을 잘 모른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Why찾기는 종종 엉뚱한 곳에 다다르고, 그곳을 Why라고 믿기도 한다.
01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원점은 어디까지가 원점인걸까? 내가 세무서에 가서 등록증을 받아왔을 때의 초심? 아니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기획자가 써준 '목적목표?' 아니면 고객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단군의 마음? 아니면 일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나의 영적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를 찾는 데카르트적 고민? 세이브 포인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필요할 때마다 입맛 가는 곳으로 돌아간다.
사실 어디로 돌아가는지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어디로 돌아간들 당신이 원하는 절대불변의 칸트적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사실 그런 건 거의 없다. 애당초 결정은 그런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초심은 흐려지고, 동기는 희미해진다. 명시된 목적목표는 닥쳐오는 매 순간의 예의성에 굴복한다. 알타미르 벽화 마냥 낡아빠진 폴더 속 '최초 기획안'에 적힌 목적목표 정도가 우리가 확인 가능한 영역일 것이다. 그게 우리가 찾고자 하는 Why 인가. 어디를 최초의 Why로 봐야 하는가
02 Why를 외부에서 찾을 것인가?
그렇다면 적힌 것이 아니라, 사업의 본질과 행위에 집중해보자. 그러나 어느 책에 적힌 또는 비즈카페 인터뷰같은 곳에서 말하는 에어비앤비 CEO의 인터뷰에 흔들려선 안될 것이다. 사업의 본질은 이미 수백년간 수많은 구루들에 의해 정립되었고 구글에 존나 많이 퍼져있다. GPT에게 물어보면 400가지 정의를 내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대출받은 개념으로 내 '본질'을 찾을 순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제 철학을 해야한다. 나만의 정의를 내려야 하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오늘 적어놓고 내일 흔들릴 멋진 문장이 아니라, 광신도마냥 믿어 의심치 않는 나의 진실을 선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겠는가? 부디 그런 깊이와 시간, 여유와 강인한 심장이 있길 바란다.
03 Why를 찾는건가, 불안을 다스리는건가?
why를 찾고자하는 시도 자체가 '무언가 잘못되어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면 잠시 멈춰보자. 이것은 본질의 탐구인가. 아니면 그저 가산편향의 명분인가. 불안하면 덧붙이고 싶다. 이불이든 깃털이든, 주변에 있는 걸 덕지덕지 몸에 걸치고 위협에 대응하고 싶다. 생각도 그렇다. 생각은 삭제되지 않는다. 다른 생각과 연결되거나 붙어서 새롭게 해석될 뿐이다.
대부분 어디선가 초심 비슷한 걸 찾은 후(또는 찾았다고 착각한 후) 첫 행동은 [무언가 새로 만드는 일]이다. 문서든 제도든 보고서든 회의든... 늘리고 붙이고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만드는 건 좋다. 그러나 그게 그저 불안에서 시작된 옵션인지, 본질에서 출발한 핵심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의 불안을 마주하고 인정할 만큼 우리는 성숙한 자기관찰을 해본 적이 있나.
04 찾은 Why가 진짜가 맞나?
옳은 질문과 옳은 방향의 대답이 필요할 것이다. 우린 이것을 훈련해본 적이 있나? 애당초 Why를 찾기 위한 올바른 질문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나. 우린 '찾으라'고만 들었지 그걸 어떻게 파고들어야 하는지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6살 우리 조카마냥 끊임없이 Why를 반복하라는 솔루션이 있었다. 실제로 5 why 워크샵을 해보니... 이건 Why로 파고드는 게 아니라 자칫 딴지걸기, 안되는 이유찾기, 따지기,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집착하기로 빠지기 일쑤였다. 단단한 생각의 지각에 허접한 드릴을 쓰는 기분이다. 조금만 단단한 곳에 부딪혀도 드릴끝은 이리저리 휘다가 결국 부러지고 만다.
때론 Why의 기준이 '지금 내 맘에 드는 단어'로 왜곡되기도 한다. 고객, 진심, 성장... 이런 단어들을 떠올려보자. '본질'이란 카테고리에서 미모를 자랑하는 3대장개념. 이 아름다운 개념이 주는 반박불가의 입틀막을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착각한다.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는 지점을 찾아낸 것이다. 그게 코어인지, 그냥 막다른 길인지 구분하긴 쉽지 않다. 이미 생각의 도파민에 절여진 채 달려왔다. 이렇게 된 이상 어디든 그 목적지를 옳아야만 하는 것이다. 옳지 않아도 그렇게 만드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우리는 충분히 똑똑하고 사유적이다. 능력과 훈련이 없어서 Why를 찾을 수 없다는 비극적인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Why를 대하는 태도가 도피가 아니었으면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수정하고 피드백하고 뜯어고치는 건 어렵다. 몸에 익었던 자세 하나를 고치기 위해선 얼마나 고된 저항이 필요한가. 자꾸 튀어나오는 관성을 이기고 매 순간 스트레스 받는 성찰을 해야한다. 그러나 우린 그것보다 쉬운 방법을 알고 있지.
바로, 새로운 곳으로 도망가는 것이다. 요가는 복잡하고 지켜야 할 게 많으니 차라리 그냥 런닝을 한다. 런닝도 지켜야 할게 많고 복잡하다면? 좋아, 그럼 맨몸운동을 선택한다. 왜 이렇게 깔짝깔짝거리냐는 질문엔 쉽게 답할 수 있다. 나의 Why는 [건강을 위한 루틴을 만든다]니까! 그러니 방법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그것에 얽매여선 안된다고 말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의사도 엄마도 너도 나도 반박할 수 없다.
반박할 수 없으면 진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건 시넥이 말한 동심원이 아니라 그냥 불안을 피해 도망친 심리적 대피소일 뿐이다. 본질본질 거리면서 하던 일을 계속 멈추고 깨뜨리면 안되는 것이다. 쌓아온 걸 무너뜨리고 리셋하는 건 Why가 아니다.
Why를 과대평가하는 건 좋은데, How와 What도 Why와 같은 선상에 있다는 걸 잊지말자. Why는 좌절된 How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어떤 방법이 막혔고, 그것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어떤 장벽을 만났다면 그 장벽을 부수고 더 힘을 써야 한다. 갑자기 눈을 감고 고민하더니 다 접고 본질로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어설픈 Why보단, 집요한 How와 기발한 What이 진실을 말한다. 손과 발로 뛰며 마주한 진실. 철학적 사유를 하지 않아도 이미 현장에서 몸에 밴 패턴들, 본능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판단들. 우리가 과대평가했던 어떤 why는 그저 우리가 세운 그 시점의 진실일 뿐이다. 결국 그 이후의 모든 행동이 다시 모여 새로운 Why를 창출한다. 처음과는 조금 다른, 그러나 더 깊고 날렵해진 Why.
Why는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How는 고귀하다. 땀과 노력이 만든 진실이다. 세련된 것에 집중하고, 더 현명한 방식으로 실행해보자. How를 다듬어라. 더 좋은 방법으로 시도해보자. 방법을 떠올릴 수 없는가? 문제는 Why가 아니라 단순히 부딪힌 현재를 이겨낼 능력이 부족한 탓일지도 모른다. 지식을 쌓아야 하고, 경험을 쌓아야 하며, 부단히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다. 막힌 그곳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 머릿 속에 선택지가 없으면 의심만 커져갈 뿐이다. 그렇게 태어난 의심은 질문이 아니다. 그건 내가 만든 판타지 속 음모이자, 불안이 낳은 리셋증후군일 뿐이다. Why는 굳이 찾고 뒤지고 되새기지 않아도 이미 매 순간 알고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도망치지 않아도 진실을 내 안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