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판의 계란 말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01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어쩌면 보통사람과는 다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내 모습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도리어 우리를 불안에 빠뜨리고, 모두가 같은 모습으로 계란판에 안착하려 안간힘을 쓰게 만든다. 이미 계란판에 들어가 앉은 계란들도 사실은 '구겨 넣어진 느낌'으로 살아간다던데.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같은 구석 하나 없이 다른 모습과 개성, 쓰임으로 태어났지만 암묵적으로 안정을 강요당하며 나를 잃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된 것 같다.
"조금만 더 안정적인 일을 할 수는 없니?"라는 끊임없는 질문.
'안정이냐, 나를 잃지 않을 용기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서 나는 참으로 괴로웠다.
안정적인 일, 그건 아마도 안정적인 수입을 의미하겠지.
과연 안정적인 일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일이라는 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그치는 걸까.
일을 할 땐 일하는 가면을 쓰고, 일터를 떠나는 순간 가면을 벗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이 '원래 다들 그렇게 사는 삶'일까.
일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과연 현실적이지 않은 건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를 잃고 싶지 않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없어.'라는 내 마음속의 외침은 어쩌면 계란판에서 불쑥 튀어나온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계란판에 앉아있을 자신이 없다.
#02
요시모토 바나나의 <<어른이 된다는 건>>을 다 읽어갈 무렵, 아빠와 대화를 나누었다.
네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분야가 좁다느니, 자리가 없다느니. 딸에 대한 사랑과 염려가 담긴 말이지만 "그래도, 계란판이 안전해."라는 말로 통역되어 내 귀로 들어온다.
이미 계란판에 있는 사람들, 혹은 계란판에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그들 중 일부는 정말 계란일 것이고, 나는 안간힘을 쓰는 모두를 응원한다.
안정을 운운하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내 안에도 두려움의 그늘이 드리워져있다. 때때로 계란판에 들어가볼까 하는 생각들이 올라오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잃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하네.
그리고 즐겁게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살고 있다는 척도로 둔다는 것은 참 행운이야.'라고.
좋다고 시작한 일도 '일'이 되면 늘 좋을 수 만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도 내가 일을 하며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었으면, 삶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만큼의 마음의 공간은 확보할 수 있을 만한 일을 하면 좋겠다.
일을 하며 힘든 순간에도 사랑하는 일, 삶이기에 힘을 내고 스스로를 응원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계란판의 계란이 되는 대신, '나를 잃지 않을 용기'를 내고 싶다.
#03
나를 잃었던, 별로 살고 싶지 않았던 시간들이 있다.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그때가 진정으로 0을 쳤던 시간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요시모토 바나나 아줌마처럼 나도 아무런 생각 없이 책상에 앉아 있었던 시간들.
학교도, 집에서의 등 떠 미는 공부들도.
나 자신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누군가를 위한 숨 막히는 시간들이 있었다.
숨 쉬는 것을 느꼈던 무렵은 내 내면을 보기 시작한 때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고, 살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삶이라는 것이,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어졌던 때가 바로 그때이다.
나 자신을 잃고 살았던 숨 막히는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를 잃지 않을 용기를 내려고 한다. 그 시간들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건조했었는지 또렷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네가 온몸으로, 온 맘으로 느끼는 모든 감정들과 감각들, 아름다움들이 삶에 안정감이나 금전적인 이익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을 하찮게 여겼다면 아마 우리는 좋은 음악, 작품, 조각 같은 것들을 얻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라는 대화 속에서 나는 결코 나를 잃지 않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