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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acle monica Sep 24. 2021

6개월 차 ; 나홀로 호텔스테이

자연주의 태교법 -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


@그랜드조선부산 부산으로 가고 싶었습니다만.




평일 연차를 내기로 했다. 한 달에 한 번 진행되는 6개월차 초음파 검사 예약 날은 금요일 오전. 평소 같으면 남편과 동행했을텐데, 이번 달에는 그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발표날이라 불가피하게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요샌 최신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그 날 확인한 아기의 초음파 사진뿐만 아니라 심장 소리가 담긴 영상을 공유해 준다고 했다. 검사가 끝나자마자 남편에게 바로 보내주기로 하고 아쉬운 마음을 대신 달랬다.



문득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꼭 한번 가보고자 미리 정리해 두었던 인천 근처의 호텔이 떠올랐다. 내가 먼저 체크인을 하고 나면, 남편은 당일 퇴근 이후에 합류하면 될 터였다. 온전히 잠깐이라도 홀로 있고 싶은 마음, 괜히 사치다 싶어 속에만 담고 있던 터였다. 초심으로 돌아가 온전히 원하는 만큼 내 자신에게 집중하기라는 태교의 원칙을 떠올렸다. 뭐라도 하고 싶을 때 최대한 즐기기로 했던 걸 내심 잊고 지냈던가 싶었다.



그 날 밤 바닷가 근처의 리조트에 머무르는 꿈을 꿨다. 귓가에 지적이는 이국적인 새 소리와 함께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지는 그런 평화롭고 고요한 섬이었다. 그리고 오롯이 주변엔 오가는 사람 없이 나 혼자 뿐이었다. (당연히 코시국에 마스크 쓸 필요도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귀엽게 봉긋 불러온 6개월차 배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나긋이 아가의 태명을 부르기도 하고 꾸준히 들려주었던 자장가 노래도 흥얼거렸다. 아기의 심장소리가 손 끝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시원한 청량감과 적당한 습도. 바람의 바스락거림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깨끗하고 새하얀 모래 사장을 거닐며 끝이 없이 이어지는 듯한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철썩거리는 파도가 발 끝에 부딪힐때의 차가운 감촉을 만끽했다. 따뜻한 햇빛 아래 썬베드에 누워있으니 온몸이 편안하게 이완됨을 느꼈다.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만을 바랐다.



아침에 되어 깨보니 평화롭고 편안했던 마음의 잔상이 강렬하게 남았다. 임신을 한 이유로 핵심 업무에서 조금씩 밀려나는게 두려워, 정신없이 할 일 목록을 늘려가면서도 바쁘게 일을 쳐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로 인해 뱃 속 아가를 염려하는 엄마의 역할에서 조금 소홀해졌나 싶어 초조함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상황에서 어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욕심을 조금 내려 놓으면 될텐데, 아직은 아니라고 나를 타일러 왔었다.



온 몸의 에너지를 다 쥐어짜내 하루를 살아내는 매일이었다. 중간 관리자로의 실무를 깔끔하게 마무리를 잘 짓지 못할까봐 내내 초조했다. 출산과 육아로 일을 넘겨야 하는 내 사정으로 팀에 피해가 될까봐 죄인인듯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다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듯했던 어떤 날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침대 밑으로 푹 녹아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 적도 있었다. 지쳐버린 몸과 마음이 간절하게 절대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나긋한 휴식을 취하는 기분좋은 상상이 몽실몽실 떠 올랐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이 '짐만 싸면 신이 난다.' 고 했던 말에 이토록 공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들떴다. 항상 짐 싸기가 설렘의 시작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구나 내심 실감했다.



1박 2일 동안 챙겨가고 싶은 건 다 챙겨가기로 했다. 적당한 옷가지들과 함께 비상약, 룸 스프레이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넣었다. 출퇴근길에 들고 다니는 이북 리더기와 혹시 넷플릭스가 보고 싶을까 아이패드까지 챙기니 제법 묵직해졌다. (마지막 2가지 아이템은 실제 단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이 함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 갈 때는 마음의 평화와 만약의 쓸모를 위해 실제로는 꼭 필요하지 않아도 챙겨야 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최근 막 읽기 시작한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Becoming> 책도 빠뜨리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남편을 둔 아내이자 그리고 두 딸의 자애로운 엄마인 미셸 오바마의 진짜 목소리가 담긴 책이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불평하지 않고 본연의 꿈과 비전을 소중히 지키며 살아온 흑인 여성의 담담하고 솔직한 자기 고백에 한껏 몰입해 있는 중이었다. 이제 최적의 태교 호캉스 준비는 되었다.

'아가야, 엄마랑 좋은 시간 보내고 오자.'



다음날, 예약된 시간에 맞추어 초음파 검사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겔의 도움으로 초음파 방망이가 내 배 위를 거리낌없이 활보하고 질주했다. 초록 모니터를 통해 만난 아가는 그동안 훌쩍 자라 머리 둘레 10cm로의 기적적인 성장을 이뤄내었다. 꼬마곰의 모습을 벗어나 손발을 움직이는 모습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도약해 있었다. 쿵쾅쿵쾅 심장 소리와 박동 간격도 정상이었다. 혹시나 하고 긴장했던 마음은 다행의 안도감으로 다시 가라앉았다.



"우리가 어떤 장소에 얼마나 애착을 느끼는 지는 그 곳을 떠나봐야 알 수 있다.

낯선 바다에서 정처 없이 떠다니는 코르크가 된 기분을 느낄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비커밍)



자발적인 홀로되기, 낯선 곳으로의 떠남은 언제나 가슴벅찬 설렘을 안겨주는 법이었다. 마침내 호텔에 도착했다. 불쌍한 임산부처럼 보일까 한껏 긴장한 채 카운터에 서 나홀로 체크인을 마쳤다. 간단한 안내와 카드키를 받아들고 신관 서쪽 타워의 디럭스 객실로 향했다. 미리 블로그를 뒤져 찾은 깨알 정보에 따라 비행기의 착륙 장면이 보이는 공항 전망의 고층 객실로 요청했는데, 룸 업그레이드까지 기꺼이 해준 호텔 측의 서비스에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먹고, 쉬고, 충분히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짐을 풀고 나니, 약간의 고단함과 허기가 느껴졌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누리나 싶어 저녁 식사는 룸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긴 메뉴판 탐색 끝에 태아와 임산부에게 위험한 식재료를 피하여 단백질 가득한 스테이크와 오레오 치즈 케이크를 골랐다. (연어 스테이크를 먹고 싶었지만, 혹시 모를 불안감에 참아보기로 했다.)



새하얗고 뽀송한 침대에 피로로 노곤해진 몸을 푹 파 묻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쉼 없이 본연의 임무를 마치고 공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들 너머 저물어가는 해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쉼 없이 울려대는 단체 채팅방의 대화에서도 훌쩍 거리를 두었다. 저마다의 감성과 취향을 뽐내고 폴로잉을 유혹하는 인스타그램의 피드에 반응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았다.



이렇게 그저 생각이 플러가는 대로 놔두었다. 몸이 원하는 대로 졸리면 자고 일어나면 또 멍하니 뒹굴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필요가 없었다. 리드미컬한 로-파이음악과 일랑일랑의 향기로 온 방을 채우니 여기가 바로 내 세상이었다. 제일 편한 파자마를 입고 그저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로움을 맘껏 즐겼다. 토닥토닥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되내었다. 엄마의 마음이 편안하고 한없이 자연스러운 상태 나는 나에게 꼭 맞는 이 세상 최고의 태교중이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쉽게 잊기 쉬운 나만의 목소리, 내 마음의 상태에 가끔은 집중하는 고요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태교라는 거창한 이름을 떼고서도 앞으로도 쭉. 눈을 감고 바쁘게 스쳐온 삶의 전환점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막연한 미래를 꿈꾸며 치열하게 공부했고 무수한 성장통을 거치며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평생 함께 하고픈 파트너를 운 좋게 만나 결혼 서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 신뢰와 애정의 결합으로 창조된 유일무이한 새로운 생명과 함께 걸어갈 앞으로의 날들이 궁금해졌다.



물론 가정이라는 운명 공동체에 따르는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가끔 버거워지지는 않을까 여전히 한편으로는 걱정스럽다. 그래도 그 안에서 가끔은 어디로 가야할지 잘 하고 있는건지 잠시 멈춰서서 그저 바라보고 싶을 때 그 마음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볼 생각이다.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내면의 의식적인 쉼을 위해 엄마가 되고 나서도 가끔은 나 홀로 찾아오는 용기를 내 보기로 다짐해본다. 똑똑, 호텔 방문을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왔나보다.






*태교 책 추천 <비커밍 Becoming>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와이프로만 알고 있었던 그녀는 생각보다 더 단단했고, 예상보다 더 진솔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내 이야기도 함께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 환경에서도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꿈을 향해 천천히 다듬질해가는 학창 시절의 모습에서는 우물안 개구리처럼 유약하지만 당찼던 소심한 소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고, 대학에 진학해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고민하던 그녀가 딱 나 같기도 했다.



어떤 종류의 일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고,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미셀의 모습은 취업을 준비하던 스무살 중반의 혼란스런 시기를 떠오르게 했다. 로스쿨 졸업 후 근무하던 법률회사에서 희노애락을 함께 나눌 수 있을만한 삶의 파트너 버락을 만나 서로의 매력에 이끌리는 장면은 내 연애 시절,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했던 설렘의 기억까지 생생하게 되살렸다.



'아가야, 엄마랑 아빠가 만났을 때도 오바마 부부처럼 이렇게 사랑의 불꽃이 튀었단다. 얼마나 좋았던지, 헤어지고 나서도 그리워 밤새 전화를 하다 잠든 날이 얼마나 많았던지.' 우리 아가도 엄마와 아빠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한지 괜히 움찔하고 신호를 보내주는 것 같다.



*두번째 추천 책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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