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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acle monica Oct 15. 2021

7개월 차 ; 감동하는 힘

자연주의 태교법 - 엄마들의 느슨한 연대를 소중히

느슨한 연대 @google





일요일 저녁부터 시름시름 앓았던 월요병을 이기고 출근한 평범한 날이었다. 출근하면서 테이크 아웃한 디카페인 아이스 라테를 음미하며 메일을 체크하고 있는 중 "띵동 띵동" 팀장님에게로부터 쪽지가 도착했다. 시간이 될 때 잠깐 자기와 면담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팀장님이 예외적으로 따로 부를 땐 괜히 긴장이 되곤 했다. 처리를 잘못한 일이 있었나? 임신 사실을 팀에 알리고 괜히 혼자 찔리는 기분도 든다. 매도 빨리 맞자는 생각에 바로 팀장님 자리로 갔다.  



"팀장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꾸 쭈뼛거리고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팀장님도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이렇게 바로 본인의 자리로 튀어 올 줄은 예상 못하셨나 보다. 우리 팀은 막 출시를 앞둔 신제품 준비로 점점 일손이 부족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도 내 나름대로는 한몫을 해야 한다고 발버둥 치고 있었고.



"아 다름이 아니고, 휴가는 대충 언제쯤 들어가나 싶어서 물어보려고. 몸 상태 봐서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알려줘"  



솔직히 막달까지 일할 생각이었다. 컨디션이 따라와 주는 한 최대한 바쁘게 지내다가 출산하러 가는 게 나의 큰 바람이었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맞닥뜨린 팀장님의 건조한 질문에 매우 섭섭한 감정이 몰려왔다. 마치 어차피 휴직할 참이면 빨리 거취를 정리하라는 회사의 직접적인 압박처럼 느껴졌다. 임신은 내가 선택한 일이고, 임신 후의 휴가와 휴직은 출산을 한 자의 당당한 권리인데 마치 대항권을 잃은 세입자처럼 쫓겨 나가는 것 같은 초라하면서도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회사는 회사였다. 그 순간 본질적으로 영리 추구를 위한 집단에 불과해 보였다. 회사에 속한 각 구성원들은 자기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매일 하루를 치열하게 경쟁하며 업무를 수행하고, 그 보상으로 한 달치 월급을 받는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그 업무의 컨베이어에서 곧 이탈해 1년 이상의 공백을 만들 사람이었고. 얼마 전 임신으로 휴가에 들어간 옆 부서의 동료의 처지가 생각났다. 서로 그 동료가 하던 업무를 팀원들이 아무도 맡지 않으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왜 그렇게 남의 일처럼 무심했었는지. 나도 결국 똑같은 회사 인간이었다.   



이젠 내 일이었다. 잠시 쉬어가야 했다. 입사 이래로 처음 쉬어간다는 사실에 대한 부담감도 내심 있었다. 입사 한지 벌써 10년, 애 낳기를 포기하고 전속력으로 업무에 매달려 질주하는 동기들도 있었다. 선배 중에는 딱 출산휴가 3개월만 쓰고 복직한 사례도 종종 들려왔다. 자리를 비우는 동안 내 사용가치가 잊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뒤처지겠거니 반쯤 자포 자기한 마음도 있었다. 솔직히 속상했다. 많이.



우연히 몇 달 전 로비 화장실에서 만나 임신 초기 소식을 전했을 때 자기 일처럼 반겨준 위층 선배가 떠올랐다. 잠깐 한 팀에서 같이 일해본 적이 있는 사이였다. 매번 의례인 듯 밥 한번 먹자며 인사치레 했던 게 다였다. 선배는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열혈 워킹맘이어서 왜인지 내 이런 모든 고민과 감정들에 대해 털어놔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겪어봤으니 나보다 더 잘 이 상황을 이해해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가 들었다.   



"많이 힘들지?"

아니나 다를까 선배는 나를 보자마자 이 말부터 던졌다. 자칫하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 솔직히 그렇게 친하지도, 그렇다고 친하지 않지도 않은 사이인데 그런데 별 다른 부연 설명 없이도 통하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먼저 들었다. 선배는 점심시간 내내 내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중간에 끄덕끄덕 하는 게 다였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회사의 울타리를 떠나 그 순간만큼은 든든한 언니 같고, 막역한 친구 같기도 했다.



점심을 다 먹고 다시 회사로 들어오는 길, 선배는 나에게 A4종이 한 장을 건넸다. 그 종이에는 출산 준비물부터 처음 육아를 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책 리스트, 그리고 1년 동안 아이를 온전히 사람으로 키워내는 데 필요한 깨알 같은 노하우가 엑셀 서식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내 푸념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렇게 귀한 노하우까지 전해받게 될 줄은 몰랐다. 단순한 도움이나 위로보다 더 고맙고 고마웠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라고, 육아에는 집단 지성이 최고라며 시크하게 웃는 그녀였다.



축적된 경험은 그 자체로도 값지지만, 공유되고 전해지며 그 가치가 확장된다. 나보다 먼저 해본 사람이 있다는 것. 우리 할머니도 했고, 우리 엄마도 한 것. 그렇지만 안 해본 나로서는 부담스럽고, 두려운 것이 바로 출산이고 육아였다. 그런 점에서 정글 같기만 한 회사에서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출산 & 육아 선배가 있음에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토라졌던 옹졸한 마음이 눈 녹듯 풀어졌다. 선배에게서 느낀 건 느슨하지만 강력한 유대감이었다.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가져본 여유도 배우고 싶었다.



무언가에 감동하는 힘이란 곧 버티고 지탱하는 힘이라고 했다. 버틸 힘을 잃어버린 사람은 더 이상 그 무엇에도 감동할 수 없기 마련이다. 뒤집어 말하면, 무언가를 보고 감동할 수 있다면 그건 버틸 힘이 되살아났다는 뜻이겠지. 선배에게서 받았던 무한한 감동으로 차가운 회사에서 버틸 힘이 다시 차올랐다. 감동이라는 것은 내 안에서 자가발전처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매개로 하는 것이었다.



엄마라는 이름의 연대, 그 감동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언제든지 내가 받은 것 이상으로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 한 구석에서 따뜻하고 뭉클한 아지랑이 같은 감동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아가야, 세상은 거칠고 냉정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따뜻함을 마음에 품고 베풀면 그만큼의 따뜻함도 네게 돌아올 거란다. 우리 만날 날까지 엄마도 할 수 있는 한 많이 감동할게. 우리 만날 날까지 따뜻한 엄마 품에서  잘 지내고 있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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