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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Apr 13. 2021

해외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남기

중동 두바이에 6년째 살고 있는 외국인 (한국인) 노동자

2016년 1월, 처음 중동 두바이 땅을 밟은 이후로 약 5년 3개월이 지났다.

겁도 없고, 무서울 게 참 없었던 20대 초중반의 나로서 그 당시 내 결정은 지금 생각해도 참 무모했다.


어렸을 때부터 하고싶은 일, 되고싶은 사람, 기타 등등 그냥 꿈이 너무 많았다.

외교관을 꿈꾸기도 했고, 음악가를 꿈꾸기도 했으며, 디자이너, 의사, 호텔리어, 방송국 PD, 아나운서, 기자, 등등. 이 세상에는 할 일이 왜이렇게나 많은건지. 다 나열하기도 힘들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집안의 첫째 외동 손녀딸로 약 9년정도의 시간을 보내서일까. 온갖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 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할머니, 이모 - 그들의 모든 시선은 나를 향했고, 나의 말이 곧 "법" 이었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때문에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의 나의 기억은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와 항상 함께 한 기억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유치원에서의 모든 활동 또한 엄마보다는 할머니와 한 기억이 대부분이고, 덕분에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관계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 무렵,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엄마, 아빠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주말에만 만나던 엄마, 아빠와 같이 살기 시작했을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는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건, 매일 밤 잠에 들기전, 할머니, 할아버지댁에 전화를 해, 문은 잘 잠그셨는지, 늘 확인했던 사실이다. 내가 너무 유난히도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해 집착(?)을 해서 엄마, 아빠한테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도 살짝 남아있다.


태어나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자라지 못한 영향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아빠가 조금 어색했고, 무서운 존재였다. 물론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서도, 어렸을때의 기억은 참 오래 지속되는 듯 하다. 나와 다르게, 태어나자마자 부모님과 함께 자라고 성장한 내 어린 여동생 같은 경우에는 동생-아빠 관계가 나-아빠 관계와 조금 다르다는걸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되었다.


온 집안의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으면서 자라서인지, 항상 그 기대에 미쳐야 한다는 뭔지 모를 압박감에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나 혼자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왔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참 어려서부터 욕심도 많았던 것 같다. 나와 9살 차이나는 동생이 태어났을때, 동생이라는 느낌보다 내 자식같다는 느낌이 더 많이 들었다.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이고, 동생 어린이집을 데려다주는 일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동생이 3살이 되던해에, 미국에 살고계신 이모댁에 엄마, 동생이랑 놀러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약 6개월 정도 미국 초등학교 생활을 경험하면서, 수학 경시대회도 나가보고, 플릇 연주로 대회에 나가 상도 타보고, 미술 대회 상도 타보고, 게다가 초등학교 졸업까지 마치게 되었다.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무슨 깡으로 그 모든걸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때는 유학생이라는 단어가 무색할만큼, 그냥 여행하러온 느낌이었기 때문에, 뭐가 힘들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주변에 또래 한국인 친구들이 영어를 너무 잘해서 부러울 뿐이었다. 6개월동안 나의 기억은, '영어 잘하는 친구들이 부럽다' 였다.


미국에서 초등학교 졸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니, 또 한국 초등학교에서의 졸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곧잘 수업에 잘 따라가고, 공부를 못하는 편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다지 공부를 엄청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내가 해야할 것을 이해하고, 할일은 하는 편이었다. 졸업 후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내가 원하는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조금 아쉬운 마음은 있었지만, 그 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내가 초등학교 6년동안 지내면서 만난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친구들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다름"을 배운 것 같다. 이전까지는 같은 동네에서 비슷한 수준의 집안에서 온 친구들끼리 지내면서 놀다보니, 다르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니, 너무나도 다양한 집안 환경에서 온 친구들이 많다는 걸 깨닫고 한 몇개월동안은 많은 생각에 잠겼었다.


중학교 1학년 1학기가 끝날무렵, 내 기억으로는 엄마가 나에게 질문을 했던 것 같다. "xx아, 너 미국가서 공부할래?" 정확한 질문은 기억이 안나지만, 그때 나는 "응!" 한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던 것 같다. 무작정 영어를 그냥 너무 잘 하고 싶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그냥 잘- 하고 싶었던 기억밖에 없다. 미국에 사는 이모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고, 그렇게 중학교 1학년의 나는 엄마와 함께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약 한달이라는 시간동안, 서류 공증이며, 대사관 인터뷰며, 기타 등등 의 준비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미국 출국 날짜가 다가와 있었다. 그 한달동안 아빠는 해외 출장 중이었다. 심지어. ㅋㅋ 지금도 엄마와 그때 얘기를 하면, 둘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며 한참을 웃는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엄마와 나. 이렇게 둘이서 미국 학교 7학년 학기 일정에 맞춰 미국으로 출국했다. 공항에서 이모를 만나 집으로 오면서까지도 사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몇일간의 시차적응 및 휴식 시간이 지나, 어느새 학기 첫날이 되었다.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 학기 첫날, 등교를 했다. 모든게 새로웠다. 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으며, 심지어 그들의 언어를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서러운 환경이었는데, 나는 마음이 더 독하게 먹어졌다. 참 독한년이었나보다.ㅋㅋ


매번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한테 따로 찾아가 반복적으로 했던 말이 있다. "Hello, Mr./Mrs./Ms. xxx, my name is Hannah, and I am an international student from Korea. My English is not good." 뭐 이런식의 문장이었던 것 같은데, 솔직히 지금은 기억이 잘안난다. 그냥 저 문장만 열심히 외워갔던 기억만 난다. 다행히 모든 선생님들이 친절하게 나의 상황을 이해해주셨고, 많은 도움을 주셨다.


한 2주정도 지났을까, 하루는 엄마가 내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 두께 및 안에 내용을 보더니, "xx아, 너 이거 어떻게 하려고 하니.. 그냥 엄마랑 같이 한국 가자. 너 다시 한국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해. 같이 가자." 라고 하는게 아닌가!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물론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교과서 내용에다가 책 한페이지를 읽으려면 영어 단어 뜻을 찾는 데에만 한시간이 걸렸다. 책 내용을 이해는 커녕, 단어 뜻 찾는 데에만 그정도 시간이 걸렸으니, 뭐, 매일이 전쟁이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저 말에 오히려 "안돼, 나 못가. 힘들어도 못가. 자존심 상해서 못가 절대." 그 어린 나이에 무슨 자존심이 그렇게 상했는지, 힘들어도 절대 못간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는 약 2주간의 시간을 나와 보낸 뒤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 홀로 (물론 이모네 가족과 함께)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약 2년 반동안의 유학생활동안 정말 힘든일도 많았지만, 뿌듯하고 기쁜일도 너무 많았다.

서러운 일도 물론 많았고, 남모르게 운날도 참 많았다. 그래도 나는 영어를 참 잘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도 참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었지만, 너무 길어지므로, 일단 여기에서 멈추는 걸로 하고. 지금 현재 중동 두바이에서 Business Development 겸 Marketing 일을 하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내가 살아온 삶, 걸어온 발자취를 조금씩 조금씩 나만의 공간에서 풀어보려 한다.


2021년 4월 11일 HANNAH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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