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번의 초퍼
"우리가 보는 유명한 뮤지션들, 음악하는 걸 보는 게 아니고 연습하는 걸 보고 있는 거야. 다 연습의 연속선상인 거지."
글김현성(가수) 사진임종진(사진작가)
1968년, 열일곱 살의 신현권은 홀로 시외버스를 타고 동두천으로 향했다.
“대낮부터 밴드 소리가 들리는 거야. 심장이 터질 것 같더라고. 읍이니까 거리가 2,3백 미터 밖에 더 되겠어. 골목길에 클럽이 한 백 개는 됐나? 엄청 많더라고. 저녁에 오픈하는데 낮에 밴드들이 연습하는 거야. 제일 멋있는 데로 무조건 들어갔지. 그냥 맨 몸으로. 좀 써 달라고.”
테이블 다섯 개짜리 클럽에서 시작된 베이시스트 신현권의 음악 인생. 미8군에서 음악을 배운다는 것이 그 시절 음악 공부의 엘리트 코스처럼 회자되지만 실상은 청소나 미군들의 심부름을 비롯한 클럽 안의 온갖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고된 생활이었다. 클럽에 와서 연주하는 미군들의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는 것이 음악을 배우는 것이었고, 운이 좋으면 그 군인의 작업실에 가서 간단한 레슨을 받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나 정식 음악 교육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생활은 그의 표현대로 ‘지옥’ 같았고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조금이라도 빨리 연주 실력을 쌓는 것이었다. 그렇게 8년을 보냈다.
동두천을 떠나서도 오랫동안 변두리 지역의 클럽이나 주점에서 ‘오부리’ 밴드로 일하며 지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뮤지션의 행보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중학교 동창인 김명곤이 ‘사랑과 평화’로 일찌감치 유명세를 얻고 송홍섭이 이십대 초반에 베이시스트로 중앙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봐야했다. 70년대는 그룹사운드 열풍이 불던 시기이고 미8군 출신 뮤지션들이 대거 ‘일반 무대’로 뛰어든 때였지만 이 시기에 신현권의 밴드 경력은 전혀 없었다.
“나는 동년배, 동시대에 음악하는 사람들 기준으로 봐도 너무너무 부족한 게 많았어. 약간의 편차가 아니고 너무 떨어져 있는 거야. 뭘 하고 싶어도 (실력이) 좀 비슷해야 할 수 있잖아. 그 정도도 아니었어.”
세상의 수많은 ‘보통’ 뮤지션들은 저 말에 담긴 무게감을 알 것이다. 재능 없이 음악을 한다는 건 불빛 없이 어둠 속을 걷는 것과 같다. 재능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좌절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그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보다 음악에만 집중하고 한눈팔지 않고 어떻게든 음악을 하는 길을 택했다. 자신이 연주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다면 오래전에 그만뒀을 거라고 말한다. 그 시절로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음악은 늘 새롭고 닿을 듯 도달할 수 없는, 그래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끝까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마침내 ‘중앙’에 진출한 것은 동두천을 찾아간 때로부터 16년이 지난 1984년 무렵이었다. ‘히식스’의 리더 김홍탁이 갑작스레 미국으로 떠나면서 남은 멤버들이 새로 밴드를 결성하려는데 베이스 자리가 빈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재결성된 그룹사운드 ‘히파이브’의 멤버로 합류했다. 이들의 주 무대는 리버사이드 나이트클럽이었는데 당시 밴드의 연주력은 외국 뮤지션들도 감탄하며 구경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그는 프로 뮤지션으로서 한 단계 진화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 스튜디오의 전속 연주자로 발탁되었다. 이때부터 당대의 주요 가수들의 음반에 참여하게 되었고 불과 2~3년 사이에 정상급 세션 연주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내 노래 중에도 그가 연주한 곡들이 많다. 특히 발라드 곡을 녹음할 때는 그만의 베이스 톤이 주는 감성 때문에 일순위로 찾곤 했다. 그와 일할 때면 늘 마음이 편했다. 그의 연주로 곡이 더 좋아질 거란 기대와 무리 없이 녹음이 끝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연주자였고 녹음에 임하는 성실한 태도는 동료들의 존경을 받아 왔다.
이제 그의 이름 앞에는 거장, 전설이라는 수식이 붙는다. 그가 지금껏 쌓아온 경력만으로도 신현권만큼 그 호칭에 부족하지 않은 연주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음악을 처음 배우고 “바닥을 박박 기던” 시간들 어디에도 이런 영광의 징조는 보이지 않았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음악과 씨름하고 있을 후배들에게 말한다.
“안 되는 건 없어. 노력을 하면 돼. 왜냐면 나 같은 사람도 됐거든. 언젠가는 된다고. 그런데 99.9프로가 중간에 딴 데로 가. 딴 생각을 해. 그래서는 절대 알 수가 없어.”
그리고 음악적 한계와 생활 사이에서 고민하는 연주자 후배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했다.
“처음 음악에 눈을 뜨면 프레이즈라든지 음악적 사고가 갖춰져서 지문처럼 각인되거든. 음악의 지문을 바꾸려면 자기가 한 번 불에 타야 돼. 그런 각오로 해야 조금 감이 와.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둘 중에 하나 밖에 선택의 여지는 없어. 그런 극한의 상황까지 가야 지문이 싹 바뀔 수 있어. 내 기준은 그래.”
그는 연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최근 이승철 밴드의 멤버로 투어를 다니고 있는 그는 공연에서 노익장의 ‘화려한’ 베이스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녹음실에 앉아 조용히 연주하는 모습만 보아온 내게는 무척 낯선 광경이지만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펑키한 베이스 솔로를 훌륭하게 연주해낸다. 그는 8마디의 초퍼를 연주하기 위해 600번을 연습했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유명한 뮤지션들, 음악하는 걸 보는 게 아니고 연습하는 걸 보고 있는 거야. 다 연습의 연속선상이거든.”
이 한마디에 그의 음악 인생이 모두 담겨 있는 것 아닐까. 악기를 잡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고, 연습과 무대의 경계도 없이 음악으로 살아온 그는 거장, 혹은 전설 같은 호칭보다 그저 악사로 불리고 기억되길 바랐다.
신현권(베이시스트) - 전라북도 남원 출생. 서울예술고등학교에 트롬본 특기생으로 입학하나 자퇴하고 동두천 미8군을 찾아가 음악을 배웠다. 동두천의 클럽에서 8년가량 베이스를 연주하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변두리 지역의 떠돌이 악사로 생활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조금씩 연주 실력을 인정받게 된 그는 그룹사운드 <히 식스>의 리더인 김홍탁이 미국으로 떠나고 남은 멤버들이 결성한 <히 파이브>에 베이스 주자로 합류한다. 이후 서울스튜디오에 소속 연주자로 발탁되어 당대의 주요 음반에 참여하게 되었고 90년대, 2000년대에 걸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베이스 세션 연주자로 활약하게 된다.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현역 연주자로 활동 중인 한국 대중음악 역사의 산 증인이자 독보적인 경력을 지닌 최고의 악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