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마음 자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llein Apr 19. 2024

고마운 아픔

우연히 봄을 찾았다.

바람이 불었다. 옷깃을 세웠다. 겨울의 한 복판에 있는 것처럼 겨울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겨울이 언제 끝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이미 겨울은 떠나 있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서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깨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경계에 선다는 것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현재의 익숙한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나는 계절의 경계를 넘지 못했다. 이유는 무력과 무의미 때문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한다. 시작도 끝도 없다. 봄이 왔는데도 여전히 겨울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래전부터 글을 쓸 수 없었다. 글감이 떠 올라 글을 쓰려하면 방금 생각했던 글의 소재가 빛처럼 사라졌다. 무엇을 생각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전에는 다른 것에 몰두하다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곧 기억이 났었다. 그러나 머리를 쥐어짜며 기억해려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화가 났다. 자존심도 상했다. 걱정도 되었다. 젊은 사람도 치매에 걸린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 들 중 한 명이 내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다.


대안이 필요했다.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휴대폰 메모장에 적었다. 메모 중에는 글에 관한 것도 있었다. 글감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머릿속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문장들이 나열된다. 그럴 때마다 문장들을 기억하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메모장에는 모든 것을 적을 수가 없었다. 대신 생각의 매개가 되는 단어들을 적었다. 때로는 직접 쓰기도 했다. 손글씨는 어색했다. 겸연쩍게 손에 쥐어진 펜이 스프링이 있는 대학노트 위를 갈팡질팡 헤매듯 지나갔다. 내가 썼는데도 글씨는 낯설어 보였다. 애석한 것이 글을 쓰는 속도가 느렸기에 시간이 지나면 문장들은 유효기간이 지난 것처럼 뿔뿔이 사라졌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메모장과 노트에 기억을 남기는 일은 꽤나 번거롭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 여파가 한몫을 해서인지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몸살이었다. 두통과 목이 아팠다. 잘근잘근 온몸이 쑤셔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수시로 하던 메모도 중단되었다. 몸이 아프니 무언가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잡념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난 일의 결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나는 나에게만 집중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점점 몸이 나아지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통이 사라지고 머리가 가벼워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마음도 진공청소기로 흡입해 버린 것처럼 홀가분했다. 그러자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 생각하면 바로 잃어버리던 증상도 나아졌다. 글을 쓸 의지와 새로운 생각들이 봄의 새싹처럼 살아나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나는 봄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이 무기력했다. 삶의 리듬도 깨졌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봄이 왔지만 나는 여전히 겨울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영원히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아팠다. 아프니 나에게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것은 버리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냄새가 났다. 냄새는 무료하고 건조한 오후처럼 느슨한 봄의 냄새였다. 이제야 나는 계절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안아보듯 큰 숨을 쉬었다. 봄이었다. 반가웠다. 모든 것이 고마운 아픔 덕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에 감정이 남는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