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에 대하여

"물론이겠지. 누가 당신에게 당신 성생활에 대해 묻는다면 진실을 말하겠어요? 질문하는 사람이 당신 이름조차 모르고 혹은 전화로 질문을 해서 당신 얼굴을 보지 못한다 해도 당신은 거짓말을 할 거예요. '섹스를 좋아하세요?''뭐라고요!''몇 번 하세요?''하루에 여섯 번요.''포르노를 좋아하세요?' 미치게 좋아하죠.' 그러나 이런 건 모두 거짓말이에요. 상업적 관점에서 볼 때 에로티시즘은 애매한 거죠. 모든 사람들이 에로틱한 생활을 꿈꾸지만 동시에 그것이 그들의 불행, 욕구불만, 질투, 열등감 그리고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에 에로틱한 삶을 증오하죠."

-밀란 쿤데라 <정체성>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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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포틀랜드의 본사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각 오피스의 채용 담당자들이 모여 서로의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 앞으로의 채용 방향과 전략 등을 함께 토의하고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기도 하는 꽤 유용한 목적을 가지고 진행된 offsite 행사였다.

세계에서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에이전시로 손꼽히는 본사의 직원들은 물론, 업계 특성 상 가장 핫하다는 도시들에서 가장 핫한 사람들을 찾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3박 4일의 일정 내내 웃음과 깊은 인상, 놀라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타이트한 일정을 마치면 본사 직원들이 예약해둔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짧은 뒤풀이를 하곤 했는데, 역시 꼭 한국이 아니어도 마지막 날은 약간 먹고 죽자 분위기가 되기 마련인가 보다.  그동안의 빡빡한 일정에 복수하듯 우리는 웃고 마시고 춤추며 우리는 일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즐기려고 산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아이를 출산한 후 결혼 생활에 느끼는 불만을 털어놓는 언니(나이가 나보다 많은지 적은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이를 출산했으니 내게 '언니'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가 있었는데, 그녀는 섹스를 하지 않게 된 것에 굉장히 우울해했다.

글쎄, 섹스를 왜 꼭 해야만 하는데?

나는 그냥 섹스도 채식을 하는 사람이 있고, 육류를 섭취하는 사람이 있고, 글루텐 프리 식사를 하는 사람이 있고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있듯이 그냥 기호의 문제일 뿐 안 한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양에서는 섹스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섹스를 하지 않아도 전혀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시간에 음식을 요리하는 즐거움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즐거움, 독서를 하는 즐거움이나 반려견과 산책을 하는 즐거움처럼 다른 '취미'를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섹스로만 한정하기엔 너무 지루하지 않은가. 우리는 분명 섹스 없이 어린 시절을 즐겁게 잘 지냈는데, 단지 성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섹스가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인 것처럼 강요받는다. 워낙 많은 경제논리와 산업, 심지어 정치까지도 섹스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섹스가 성인으로서 누려야 할 궁극의 쾌락이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그 때문에 얼마나 불행해지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섹스 없이도 즐거울 수 있다. 꼭 부모님이 두 분 다 계셔야 행복한 가정이 아닌 것처럼 섹스가 있어야만 행복한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없어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섹스 없이도 행복한 결혼 생활이 가능할 수 있고, 섹스 없는 우정이 섹스 있는 연인 사이보다 더 친밀하고 단단할 수도 있다. 이성 간의 사랑이 우정보다 더 고귀하고 값진 것이라는 강박관념 또한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대단한 취급을 받는 섹스의 영향력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섹스를 터부시 하면서도 동시에 신격화하는 이러한 이중성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니 사람들이 섹스에 미치지.

우리가 섹스를 제정신으로 바라보는 날,

우리는 많은 것에 대해 진실해질 수 있을 것이다.

너 덕분에 내 눈이 떠졌어.

나에게 놀라운 눈으로 몇 번이나 이 말을 하던 그 언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녀는 과연 다음날 숙취에 깨고 나서도 우리가 나눈 대화를 기억해낼 수 있었을까?

기억해내지 못해도 상관없다. 나는 그녀가 어떤 취미를 가지든 존중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섹스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