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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storyteller Dec 20. 2020

위 아 40

The 40-Year-Old Version

<위 아 40>라....


<위 아 영>이라는 노아 바움백 감독의 2014년 작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 좀 식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40이라는 숫자가 딱 그 길목에 서 있는 나에게 전혀 어필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소 식상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약간의 적당한 흥미를 느끼며 아는 배우 이름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이 영화의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영화는 옆 방에서 섹스하는 소리를 적극적으로 엿듣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 방에서 옆 방 여성의 울음소리가 새어들리고 나서야 그녀는 대리만족을 한 듯이 방 벽과 하나과 되었던 몸을 떼어낸다. 이제 좀 덜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지만 그녀는 소파에 누워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무료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바지가 맞지 않습니까?


홈쇼핑 채널에서 나오는 멘트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한심함의 아우라에게서 벌써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현실도 우울한데 굳이 확인 사살할 필요가 있을까. 창 밖을 보며 멍하니 있으려 해도 지나가는 노숙자가 멈춰 서서 똥을 누는 그녀의 일상에 "Winner 30 under 30 (30세 이하 30인 극작가상) - 라다 블랭크"라고 쓰여진 찬란한 트로피와 그 옆에 놓인 그녀와 그녀 엄마가 함께한 사진은 그녀가 원했던 그 모든 것들이 과거에 남겨져있음을 넌지시 보여준다.


여자가 40이 된다고 하면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이 영화는 유독 여성들에게 절망적으로 다가오는 40이라는 나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40이 되어도 뛰어서 버스를 잡아야하고 심지어 버스 운전기사로부터 억울한 모함(?)을 당하기도 하며, 돌아가신 엄마의 아파트 정리를 1년 간 미루는 것에 대해 탓하는 친오빠의 메시지를 듣고도 적절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고등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치는 일도 쉽지 않다. 재능은 있지만 자기애가 넘쳐 분에 넘치는 칭찬을 갈구하는 학생이나 백인 여자의 거기는 흑인 가정을 파괴하는 위한 장치라며 유치한 헛소리나 내뱉는 전형적인 십대 남학생들, 아니면 자기에게 반해 수업시간 중에도 대놓고 추파를 던지는 레즈비언 학생까지 누구 하나 무난하지 않고 그녀의 한심한 아우라를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그래도 그녀는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조언을 한다.


농담 실컷 해라.

그래도 명심해 너희 연극이야. 다 너희에게 달렸어.

아무 노력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


선생님 커리어처럼요?


아무리 성인이라도 이런 무례한 팩폭에 침착하게 대응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라면 우리는 응당 그리 해야만 한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쌓아온 경험치를 최대한 발휘하여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를 쓰지만 그녀를 향한 학생의 팩폭은 이어지고 결국 학생들끼리 싸움이 나면서 수업은 개판이 된다.


쥐꼬리 월급 받고 별일 다 당하네!


더 이상 이 한심한 일상을 견딜 수 없었는지 그녀는 자신의 에이전트인 아치에게 전화를 건다. 그들은 그녀가 날씬했고 아치가 이성애자인 척 할 때부터 막역한 친구 사이. 드디어 암울하기만 한 그녀의 일상에 한 줄기 빛이 든다.


학생 하나를 죽이거나

하나랑 자거나 할 것 같아.


유머러스한 이 영화의 주인공의 실체와 우리가 부러워할 만한 그녀의 친구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우리는 이 영화가 현실 고발 사회파 영화가 아니라 블랙 코미니 영화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렇게 긴장된 마음을 풀고 그들이 늘어놓는 농담과 어이없는 상황들을 마주하며 킥킥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난 네 교사야.


다이어트 음료를 마시는 그녀에게 통통한 여자가 좋다며 추파를 던지는 학생을 향해 그녀가 던지는 저 대사를 보고 있자면 2002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김하는 주연의 드라마 <로망스>가 떠올라 한국인임에도 이 영화를 미국인보다 더 재미있게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도 그녀의 인생을 쉽지 않다. 학생들에게 큰 소리 쳐놨건만 지역 시어터에서 워크숍을 하기조차 쉽지 않고 아무리 요즘 유색인종 여성작가가 인기일지라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여전히 백인 남성 권력자다.


J 휘트먼은 흑인 빈곤 포르노만 올리는데 내 건 그런 거 아냐.

끝내주네.

난 이렇게 허탕이나 치려고 자위 그만두고 빼입고 와서 맛난 고기를 거절한 거야?


하지만 그녀에게 더 이상 뒷걸음 칠 한 발자국도, 내세울 자존심도 남지 않았다. 그녀도 '노회'한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혁명과 이상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한낮 꿈이며, 허망한 기대이고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쓸데없는 희망이라고 스스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점점 더 현실주의자가 되어간다. 20대의 젊은 여자가 돈 때문에 결혼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돈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만이 결혼의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나이 마흔이 넘은 여자는 돈 이외의 다른 이유 때문에 결혼하는 경우가 드물다. 심한 경우 오로지 돈 때문에 결혼하기도 한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더 뻔뻔해진다. 이러한 금전주의와 유물주의, 현실주의는 나이 든 사람들의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특징이다. 중국 (정확히는 대만)의 석학 링위탕 박사는 이것을 노회라고 부르며, 중국인들의 특징적 성격이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노회해지지 않으면 그는 저능아이거나 매우 특이한 정신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린위탕의 말을 빌려오면 "노회의 정신은 종종 이상과 행동을 거부한다. 개혁을 향한 희망을 깨뜨려 버리고, 미래에 대한 정열과 의지르 비웃는다. 인간의 능력은 초라한 것이며, 순수와 정열은 기만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의 펄펄한 성격과 강한 자기 주장과 미래에 대한 희망에 대하여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자신은 한 발 물러나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 中



얼굴에 철판 딱 깔고 잘난 백인 유명 제작자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다행히도 아직 덜 노회하였는지 흑인인 그녀의 아이덴티티를 모욕하는 그의 거만한 조언에 흥분하여 결국 라다는 파티장에서 그의 목을 조르고 만다.


그리고 이렇게 우스운 상황에 이어진 씬에서 나는 이 영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단연코 이 영화가 내가 2020년 본 영화 중 최고로 내 마음에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화려한 파티장과 대비되는 그녀의 초라한 아파트에서 커다란 쿠션에 파묻힌 채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며 그녀는 절규한다


난 예술가가 되고 싶을 뿐인데...

엄마... 제발....

엄마 뭘 어째야 하는지 알려줘...


그 순간 갑자기 그녀의 귓가에 랩이 들려오고, 그녀는 랩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그렇다 우리도 한때 신인류이지 않았나. 기성세대의 문화에 반항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외치던, 2020년에 마흔 언저리인 우리들은 하이 파이브 오브 틴에이저(H.O.T)들이지 않았던가! 왜 나이가 들어서 노회하지 않으면 저능아이거나 특이한 정신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가? 노회한 사람들은 무슨 권리로 노회하지 않은 사람들을 폄하하는가?


젊은 놈들이 좋긴 하지

근데 밤 10시만 되면 난 피곤해 쓰러지지.

다리 때문에 나가는 돈이 한 두 푼이 아닌 상황.

방귀인 줄 알고 뀌었는데 아니어서 당황.

요새 힙합 보면 무슨 내가 노인네 같아.

소리만 요란한 노래를 언제까지 부를 건가.

춤 좀 춰보려 해도 다리가 걸려.

그래, 이게 40살 인생이다.

40살 인생!


그렇게 그녀는 친구이자 자신의 에이전트 아치에게 선언한다.


믹스테이프를 만들려고.

백인 남자 엉덩이가 주제야?

아니, 40살 여자 이야기. 인스타그램에서 DJ이자 프로듀서를 찾았어.

못 산다.

이름이 D인데 전화를 안 받는대. 마리화나 한 봉지 들고 찾아가는 식인 것 같아. 여하간 이 사람의 비트가 쩔잖아, 아치.


과연 그녀가 D와 만나는지, 그래서 음악을 만들고 작가가 아닌 래퍼로 성공을 하게 되는지 아치와 그녀의 우정은 영원할지 그녀의 문제아 학생들은 언제나 그녀의 속을 썩이기만 하는지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넷플릭스에서 이 영화를 보기를 추천한다. 나는 감히 이 영화의 연출, 각본은 물론 그녀 자신의 이름이기도 한 주연 라다 블랭크 역까지 해낸 라다 블랭크가 영화 <작은 아씨들>의 그레타 거윅보다 더욱 주목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위트 넘치는 대사들과 예쁘게 포장하지 않는 현실들 사이에 터져 나오는 강력한 랩의 놀라운 발란스는 흑인 여성으로서 라다 블랑크의 아이덴티티 위에서 굳건하다. 하지만 그녀의 세계에서는 한국계 미국인 게이, 고등학생 레즈비언도 각자 자신의 아이덴티티 위에서 굳건해서 라다만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린 왜 이제서야 이렇게 사랑스러운 인물들을 영화에서 만나게 된 것일까. 아마도 스스로를 '정상, 표준'이라 생각하며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로로만 세상을 바라본 백인들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아직도 많이 변해야 할 이 세계를 앞으로 어떻게 힘을 모아 변하게 할 수 있을지 이 영화의 결점 많은 인물들-심지어 성적 취향과 인종마저- 통해 즐겁게 상상해볼 수 있어서 창작자로서 라다 블랭크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그녀가 창조해준 라다 블랭크와 아치 최라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캐릭터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성적 긴장감이 제거된 남녀 간의 우정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언제나 이성적인 사랑보다 우정에 매료되어 왔다.

내 인생의 아치를 오늘도 꿈꿔본다.

연출, 각본, 주연마저 소화해낸 라다 블랭크
라다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에이전트인 아치 역의 피터 킴. 아치와 마찬가지로 한국계 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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