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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의 기억

포천&홍콩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포천에서 온 동료는 이상할 만큼 추위를 타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나는 약간 손이 시리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에도, 그는 전혀 춥지 않은 듯 태연했다. 사실 나 역시 북쪽의 추위를 모르는 건 아니다. 이십 년 전 가평에서 군생활을 하며 영하 20도의 추위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 매서운 한기가 얼마나 뼛속까지 파고드는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포천이 서울보다 2~3도 낮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이해가 됐다. 그의 몸은 매일 그 추위 속을 버티며 이미 그 온도에 맞게 조율되어 있었던 것이다. 겨울철 히터를 켤지 말지를 놓고 벌어지는 고민에서, 그는 늘 "아직 춥지 않은데요?"라며 히터 스위치에 손을 대지 않는 쪽이었다. 반면 나는 슬그머니 히터를 켜고 싶어졌다.


흥미로운 건 여름이 되면 상황이 역전된다는 점이다. 냉방을 켤지 말지를 놓고 다시 한번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이번엔 그가 "너무 더운데요?"라며 에어컨 리모컨을 먼저 찾는다. 그 동료는 추위에 강한 대신 더위에는 취약했다. 마치 추위 저항을 올리면 더위 저항이 내려가는 게임 캐릭터 같았다.


나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홍콩에서 5년을 살았다. 34~35도에 습도 80%라는 살인적인 조합 속에서 일상을 보냈다. 홍콩의 습도에 처음엔 숨쉬기조차 버거웠지만, 어느새 몸이 적응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 한국의 여름은 상대적으로 견딜 만하다. 홍콩만큼 습하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대가는 겨울에 치르게 된다. 홍콩의 겨울은 아무리 낮아도 최저 영상 5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홍콩에는 매년 추위로 인한 사망자가 나온다. 난방 시설이 부실한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몸이 추위에 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5년 동안 홍콩에서 추위를 잊고 살다 보니, 가평에서 단련했던 내한성을 모두 잃어버렸다. 예전엔 내복 없이도 괜찮았던 영하의 날씨가 이제는 내복 없이는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결국, 우리 몸은 정직하다. 환경에 맞춰 변하고, 그 변화를 고스란히 기억한다.

어디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히터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이 달라진다. 포천에서 일했던 동료와 홍콩에서 일했던 나는 지금 같은 한국 땅에 살면서도, 완전히 다른 온도 감각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생각한다. 누군가 히터를 켜거나 끄자고 할 때, 그건 단순한 선호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의 증언이 아닐까? 체온계처럼 숫자로는 보이지 않아도, 우리 몸은 우리가 견뎌온 시간의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사무실 온도 조절 하나로도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이 드러나는 셈이다.


당신의 몸은 지금 어떤 기온을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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