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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 너머의 기회

영업을 배웁니다.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죄송합니다만, 이미 다른 업체와 독점 계약을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화상회의 화면 속 상대방 담당자의 표정은 정중했지만 단호했다. 경영진 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말까지 덧붙여졌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그들의 회의실에는 서너 명이 함께 앉아 있었다. 우리 쪽도 마찬가지였다. 영업 담당자와 나, 그리고 개발팀장이 같은 회의실에서 화면을 마주하고 있었다.


보통은 여기서 "알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며 회의를 마무리하고, 다음 영업 리스트로 넘어가야 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 팀의 영업 담당자는 달랐다. 그는 잠시 침묵한 뒤,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축하드립니다. 좋은 결정 하신 것 같습니다."


그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만약 그 프로젝트가 중간에 중단되면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가요?"


화면 속 상대방 팀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중단이요? 계약도 진행하기로 했는데 벌써 그런 걱정을 하신다고요?"


한 사람이 약간 방어적인 어조로 물었다.


"아, 제 말씀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네요." 영업 담당자가 재빨리 수습했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였다. "사실 저희도 이 분야에서 여러 케이스를 봐왔습니다. 화면 공유 잠시만 해도 될까요?"


상대방이 허락하자, 그는 재빨리 자료를 공유했다. 비슷한 서비스를 시도했다가 중단된 사례들이 정리된 문서였다.


"보시다시피, 이 서비스는 완전히 합법도, 완전히 불법도 아닌 회색 지대입니다. 결국 누가 먼저 시장을 선점하느냐가 관건이죠. 그런데 개발 중에 법적 이슈나 규제가 새로 생기면, 프로젝트가 그대로 멈춰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가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이며 설명했다.


화면 속 상대방 팀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상대방 개발팀으로 보이는 직원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개발자 입장에서 가장 난감한 게 뭔지 아십니까?"


영업 담당자가 화면을 응시하며 물었다.


"서비스를 한참 개발하다가 무너지는 겁니다.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과 인력, 비용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거죠.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죠."


나는 옆에서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그는 지금 상대방의 페인 포인트, 즉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점을 정확히 건드리고 있었다.


"저희가 드리고 싶은 제안은 이겁니다."


그가 화면 공유를 끄고 다시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지금 당장 저희를 메인 파트너로 바꾸시라는 게 아닙니다. 그건 이미 결정하신 사항이니까요. 존중합니다."


상대방이 조금 긴장을 풀었다.


"다만 말입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저희를 플랜 B나 플랜 C로 검토해주시면 어떨까요? 귀사 입장에서는 아무런 손해가 없습니다."

"플랜 B요?"


상대방 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네. 만약 진행 중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저희가 백업으로 투입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가 설명했다.


"더 중요한 건 이겁니다. 저희와 정기적으로 소통하시면, 경쟁사가 놓칠 수 있는 리스크까지 미리 체크해드릴 수 있습니다. 법적 이슈든, 기술적 맹점이든, 시장 변화든 말이죠."


화면 속에서 상대방 팀원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이건 일종의 보험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영업 담당자가 마무리했다.


"지금까지 투자하신 것들을 지키는 안전장치죠. 저희는 귀사가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그게 메인 파트너와 함께든, 아니면 저희와 함께든 말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화면 속 상대방 팀장이 동료들과 짧게 귓속말을 나눴다.


"좋습니다. 일단 검토해보겠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한번 미팅 잡을 수 있을까요?"


회의가 끝나고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종료하자, 우리 회의실에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나는 영업 담당자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저렇게 말할 생각이었어요?"


"아니요."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웃었다.


"사실 거절당할 줄 알았으니까, 거절당한 다음을 준비한 거죠. 상대방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를 생각했어요."


그의 말이 묘하게 여운을 남겼다.


훌륭한 세일즈는 화려한 제안서나 낮은 가격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절을 받아들이고, 그 너머에서 상대가 두려워하는 지점을 찾아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해, 페인 포인트를 찾아내는 것에서 진짜 영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상대의 불안을 읽고, 그 해답으로 우리를 포지셔닝하는 것.


어쩌면 진짜 영업은 ‘거절 뒤에서’ 비로소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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