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 민둥산
인터넷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 내게 속삭입니다. 그것은 민둥산의 돌리네, 대지에 뚫린 하나의 숨구멍 같은 것. 사진 속 그 동그란 구멍을 바라보는 순간, 저는 이미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여행의 진짜 출발점이 아닐까요?
백패킹 후 출근을 과감히 시도하기 위해 일요일 오후 2시 쯤 집을 나섰습니다. 다들 아는 들머리 증산초교로 향했지만, 늦은 도착 시간 때문에 돌리네 쉼터까지 호기롭게 차량으로 이동 했습니다. 다행히 주차 공간이 있었네요.
쉼터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 정도 소요 되었지만, 그 엄청난 풍광 앞에서 문득 미안함이 밀려왔습니다. 이토록 장엄한 선물을 받기에는, 제가 산에게 바친 노력이 너무 적었던 것은 아닐까 하구요. 차량의 도움을 받아 쉽게 올라온 길이, 갑자기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해발 1천미터 넘는 산의 묘미는 만져질듯 가까운 구름에 있는거 같습니다. 구름에게 일단 정상 신고를 깍듯이 하고 보답이라도 하듯 열심히 구석구석 탐험을 해봅니다.
돌리네는 마치 지구가 숨을 쉬기 위해 뚫어놓은 작은 창문 같았습니다. 혹은 누군가가 하늘에서 이 땅을 들여다보기 위해 만들어놓은 비밀스러운 통로일지도 모르죠. 그 둥근 입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정말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은 아닐까 하는 상상에 빠져드는거 같습니다. 그 다른 세계란 무엇일까. 나의 마음 깊숙한 곳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누군가의 기억 속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이 신비로운 구멍을 보며 무엇을 떠올릴까 궁금해 졌습니다. 어떤 이는 어머니의 품속 같은 따뜻함을, 어떤 이는 삶의 끝과 시작이 맞닿은 지점을 보았을지도 모르죠. 각자의 그리움과 소망이 그 동그란 테두리 안에서 하나로 스며들고 있다는 생각에 좀더 가까이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바닥에 고인 하늘은 또 다른 세상의 하늘인 듯했습니다. 구름이 그 안에서 거꾸로 흘러가고, 새들이 아래에서 위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네요. 혹시 그 반대편 하늘 너머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희망들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닿을 수 없는 손길들, 다하지 못한 말들, 이루어지지 않은 꿈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작은 구멍을 통해 나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과거의 나일까, 미래의 나일까. 아니면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용감한, 조금 더 자유로운 또 다른 나일까. 돌리네는 그렇게 저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질문 대한 답을 준비라도 하려는 듯 돌리네에게 가장 가까운 데크에 보금자리를 펼쳤습니다. 그래 오늘 한번 잘 지내 보자! ㅎ
데크 위에 몸을 맡긴 채 밤이 깊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별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하면, 돌리네 안의 하늘도 함께 별을 품게 되겠죠.
천천히 석양을 감상하며 민둥산 역 근처에서 포장해온 음식으로 식사 준비를 합니다.
차린건 별것 없지만, 이런 평온한 풍경 앞에 앉아 있으면, 그동안 얼마나 메마른 일상을 살아왔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자연이 내어주는 이 넉넉한 식탁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여유와 감사를 다시 맛봅니다. 배와 영혼을 모두 채울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이런 곳에 누워 있으면 도시의 소음에 얼마나 귀가 익숙해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세상이 숨을 멈춘 듯한, 시간마저 정지한 듯한 깊은 적막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너무도 넓은 민둥산의 들판은 작은 생명들에게조차 은신처를 내어주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완벽한 침묵이 가능했습니다.
그런 고요 속에서 돌리네 저편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합창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이 적막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침묵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영혼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오랫동안 쌓인 피로와 소음을 차근차근 씻어내어 줍니다.
새벽이 깨어나는 순간, 태양은 하늘의 무대에서 가장 연륜 깊은 조명 감독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민둥산은 오랜 시간 이 땅을 지켜온 노련한 연출자처럼, 빛과 그림자를 절묘하게 배치하며 새로운 하루의 막을 올립니다.
그들이 선사하는 장관은 마치 저에게 "아직 떠나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어제 해질녁의 수묵 담채화는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변모해 있었죠. 태양이라는 신비로운 물감이 스며들면서, 산맥은 더 이상 고요한 수묵화가 아니었습니다. 초록의 생명력과 흑백의 차분함, 그리고 붉은 열정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순간.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던 색들이 자연의 손길 아래서는 그토록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하나의 화폭에서 이토록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지...
커피한잔이 돌리네 같지 않나요? 아마도 돌리네를 이 잔에 담아서 집에 가져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소망 담아 한잔 멋들어지게 마시고, 순례자 처럼 먼길로 돌아서 내려왔습니다. 마치 태양과 민둥산의 감동적인 예술에 보답이라도 하듯이요.
다시 와야될 곳입니다. 두번 세번 와야될 곳입니다.
그리고 LNT
ps. 백패킹 카페에서 직접 작성한 후기를 옮겨온 글입니다.